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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운동권 戰士는 이제 그만… 내가 배웠던 것과 다른 길을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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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쓴 경제학자 우석훈… 에세이 '매운 인생 달달하게' 출간 "보수든 진보든 남성 엘리트 정치, 권력 줄 서려 '어깨 싸움'만 벌여"

그는 달라졌다. 오랫동안 '운동권'으로 살아왔다. 1987년 6월 연세대 정문에서 친구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질 때 몇 걸음 뒤에 있었다. 20대 때 도시 빈민과 함께하는 민중운동에 뛰어들었다. 30대 때 진보 정당에서 일했고, 정부 기관 근무도 했다. 마흔 무렵인 2007년 낸 책 '88만원 세대'에선 불평등 경제구조에 분노했다. 쉰 살인 지금 반성한다. "내가 얼마나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았는지 알게 됐다."

최근 자전적 에세이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메디치)를 낸 경제학자 우석훈(50)은 "이제 더 이상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터뷰 요청에 "오전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줘야 한다"면서, 집 근처인 서울 평창동 카페에서 지방선거 다음 날인 14일 오후 만나자고 했다.

제목에 '달달하게'를 두 번이나 썼더라.

"그동안 운동권 한가운데에 있었다. 전사(戰士)가 되려 했다. 웃고 즐기는 것을 나쁜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군사독재와 싸우다 비슷해졌다. 인생은 작전이고 임전무퇴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제는 소리 지르지 말고, 신경질 내지 말고, 남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살살 살기로 했다."

바뀌었다. 계기가 있나.

"이제 50대다. 목숨 걸고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나 생각한다. 늦은 나이에 낳은 일곱 살, 다섯 살 아이가 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팠다. 몇 차례나 입원했다. 인생에서 뭐가 중요할까, 돌아보게 되더라."

조선일보

지난 14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난 경제학자 우석훈씨는 “그동안 ‘달달하게’와 거리가 멀게 살았다.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생활에 문제는 없다. 행복도 연습이고 습관이다”라고 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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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 '전향' 또는 소시민이 됐다고 비난받지 않을까.

"보수든 진보든 권력은 구조가 똑같다. 좋은 자리 차지하려 줄 서고 '어깨 싸움'을 벌인다. 50대에도 그렇게 살면 촌스럽다. 선진국의 50대는 취미 생활이 늘고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다. 나도 한때 패거리 만들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렇게 못 살겠다. 아이도 돌봐야 하고…."

책에 '한국은 권력 다툼만 있지, 이념으로 나뉜 적이 없다'고 썼다.

"1966년에 나온 이청준 소설 '병신과 머저리'가 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형은 '병신'이고, 경험하지 못해 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은 '머저리'다. 21세기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보수적인 60대와 진보라고 여기는 50대가 딱 '병신'과 '머저리'의 관계다. 20~30대가 보기에 이들은 똑같이 '꼰대'일 뿐이다. '머저리'인 내가 '병신'을 욕하고 있을 때 40대 이하 국민은 살기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좋은 자리 제안도 있지 않았나.

"작년에 지방 공기업 사장 제안이 있었다. 많이 고민했지만 거절했다. 줄 서서 기다리다가 '이제는 내 차례'라고 하는 게 문제다. 선진국처럼 30대 장관, 40대 총리가 나와야 한다. 국토부 장관은 월세 사는 30대 중에서, 농림부 장관은 젊은 귀농인 중에서, 교육부 장관은 어린이집 선생님 중에서 하면 좋을 것이다. 정치가 좌·우를 떠나 남성 엘리트 중심이다. 이런 환경에서 다양성은 생기지 않는다. 나는 내 행복을 팽개치고 싶지 않다."

지키고 싶은 '행복'이 뭔가.

"오전 9~10시쯤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준다. 서너 시간 글 쓰고 책을 읽는다. 오후 4시 반쯤 아이들 데리고 온다. 지난겨울 난방을 많이 해 집이 따뜻했다. 삼겹살을 배불리 먹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천국을 묘사한다면 이 이상 뭐가 있겠나. 매일매일 행복하다. 과거엔 겉으론 화려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책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이제 내가 배웠던 것과 다른 길을 가려 한다'.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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