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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사장 결재 없앴더니 직원들이 민첩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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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낮에는 회사로, 밤에는 동대문으로 출근했다. 팔리겠다 싶은 제품을 동대문 도매가로 사서 옥션에 올렸다. 주문이 들어오면 아침까지 포장했다. 아르바이트도 가리지 않았다. 어느 날은 고속도로 휴게소 버스에 올라타 흑마늘을, 어느 날은 용산 전자상가에서 휴대폰을 팔았다. 수입은 들쑥날쑥했다. 동대문에 냈던 가게는 석 달 만에 접었다. 그래도 계속 팔았다. 장사는 쉬지 않았다.

이베이에서 화장품·뷰티몰 '졸스(Jolse)'를 운영하는 배정현 대표(40)는 타고난 장사꾼이다. 군 제대 후 온라인쇼핑몰을 시작했다. 신발에서 옷으로, 화장품으로 종목을 바꾼 이후 2009년 자체 브랜드몰 '졸스'를 창업한 지 10여 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는 연 매출 126억원을 내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온라인 전자상거래 사이트 '이베이(ebay)'에서 한국 화장품을 수출하는 3000여 개 업체 중 매출이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최근 서울 역삼동 이베이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배 대표는 "2000년대 중반 쇼핑몰이 포화 상태에 달해 한국에서는 안 된다고 좌절했던 게 오히려 기회였다"고 말했다. 3억~4억원씩 들여 쇼핑몰을 시작하는 연예인을 당해낼 수 없었던 시기였다. 우연히 캐나다에 있는 지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사업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베이에서 물건을 파는데,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겠구나 하고 눈이 뜨였죠."

배 대표는 2009년부터는 한국 화장품만 팔았다. 매일 새벽 동대문에 들르기 힘에 부쳐서다. 대신 시장에 유통하기 좋은 제품을 찾았다. 가까이에서 살 수 있고, 제품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화장품을 낙점했다. 마침 3000~5000원대 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미샤, 더페이스샵, 네이처리퍼블릭, 에뛰드하우스 등 중저가 '로드숍'이 앞다퉈 생겨났다. '빨간 BB'로 불린 미샤 BB크림은 졸스에서 하루에도 50개씩 팔렸다. 구매가 늘어날수록 가격 협상력이 커졌다. 배 대표는 화장품 공부를 시작했다. 화장품 매장에 자주 갔다. 아주머니들이 모인 구청 메이크업 강좌도 찾아 배웠다. 한국 로드숍에서 화장품을 살 때 샘플을 끼워주는 것처럼 졸스에서도 외국인 고객에게 샘플을 3~5개씩 증정했다.

졸스를 통해 한국 화장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전 세계에 걸쳐 있다. 올해 4~5월 기준으로 미국(25%), 영국(8%), 러시아(7%), 캐나다(6%)가 절반가량을 차지하지만 노르웨이(6%), 독일(4%), 핀란드(3%)에서도 구매한다. 배 대표는 "졸스 회원은 약 30만명"이라며 "고객 대부분이 한국 유학생이 아닌 현지인이라 한번 써보고 성능을 확인하면 계속 구매하는 단골 고객이 된다"고 자부했다. 그는 "한국 화장품은 더 이상 'K뷰티'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품질이 좋다"고 했다.

졸스에서 현재 취급하는 브랜드는 50여 개. 하루에 배송되는 제품만 1500~2000개에 달한다. 졸스는 용인우체국 1개 층을 무상으로 임차해 쓴다. 월 배송비가 3억4000만~4억원에 육박하는 초우량 고객이다. 매출도 2016년 76억원, 2017년 126억원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졸스는 처음부터 철저히 외국을 겨냥했다. '졸스(Jolse)'라는 브랜드명은 구글처럼 짧고 뜻 없는, 쉬운 이름으로 정했다.

졸스는 오프라인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영국, 일본, 멕시코에 세운 현지법인으로 수출이 아닌 '국내 배송' 형태로 한국 화장품을 판매하려고 한다. 멕시코 몬테레이에는 한국 화장품을 모아 판매하는 멕시코판 '올리브영'을 이르면 내년 오픈한다. 전세계 33개국에 진출한 세계 최대 화장품 편집숍 ‘세포라’가 롤모델이다. 세포라 공식홈페이지에 ‘K-뷰티’코너가 있을 정도로 한국 화장품이 인정 받은 터라, ‘졸스’의 인지도와 결합하면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이 섰다. 배 대표는 "기아자동차 현지 공장 앞에서 시험 삼아 한국 상품을 팔았는데, 도매가 3배 가격에도 이틀 만에 800만원어치나 팔렸다"며 "오프라인 '졸스'로 직접 부딪쳐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졸스 직원은 총 38명. 조직은 작고 젊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로드숍 매니저, 엔지니어 등 출신도 다양하다. 모든 직원이 영어로 응대 가능하고, 웬만한 결정은 사장 결재 없이 담당자가 한다. 배 대표는 "온라인 사업은 온갖 이슈에 영향을 받는다. 하루 뒤처지면 늦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담당자가 즉각 결정하고, (결정이) 잘못됐으면 그때 가서 해결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 대표 집에는 화장품 샘플이 곳곳에 쌓여 있지만 정작 본인은 화장품을 쓰지 않는다. 배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화장품과 씨름하면서 질려버렸다"며 "스킨·로션도 안 쓴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유진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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