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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관록의 여배우들, 역사의 증언석에 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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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리뷰 허스토리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첫 투쟁
6년간 23번의 ‘관부재판’ 담아
김희애·김해숙 등 빛나는 열연



한겨레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NEW(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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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 <낮은 목소리2>(1997), <숨결-낮은 목소리3>(1999),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 <그리고 싶은 것>(2013), <마지막 위안부>(2014), <소리굽쇠>(2014), <눈길>(2015), <귀향>(2016),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이 캔 스피크>(2017)….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끝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잇는 또 한 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허스토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법정 투쟁인 ‘관부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실화의 묵직한 힘과 관록의 여배우들이 뿜어내는 연기력을 무기로 올여름 관객에게 뜨거운 울림과 따뜻한 위로를 선사할 수작으로 꼽힌다.

줄거리는 실화의 얼개를 그대로 따른다. 1991년 여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하면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역사적 사실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우던 사업가 문정숙(김희애)은 앞장서서 신고 전화를 개설하고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문정숙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집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위안부의 아픔을 숨긴 채 살아왔던 배정길(김해숙) 할머니의 사연도 알게 된다. 문정숙은 재일 동포 변호사 이상일(김준한)의 도움을 받아 원고단의 리더로서 피해 할머니들을 모아 일본을 상대로 한 법정 투쟁에 나선다. 10인의 원고단과 13인의 변호인,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여간 일본 시모노세키(관)와 부산(부)을 오가며 이어진 23번의 재판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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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NEW(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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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의 사관을 의미하는 ‘히스토리’의 대척점에 선 ‘허스토리’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 피해자가 살아낸 신산한 삶의 아픔을 그려낸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싸움을 이어가는 문 단장과 “우린 홑몸이 아니라 국가대표 선수”라며 당당히 일본에 맞서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모습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왜 지난 역사의 한 귀퉁이가 아닌 한국 여성의 디엔에이에 새겨진 현재진행형 아픔인지를 낱낱이 밝힌다. 또한 재판에 참여하는 피해자들과 문 단장 사이에 흐르는 감정적 교류뿐 아니라 문 단장의 주변 인물인 지역 사업가 신 사장(김선영), 여행사 직원 류선영(이유영) 등 주변 여성들과의 연대 과정도 촘촘하게 그려낸다.

한편으론 ‘법정 드라마’의 장점도 빛난다. 문 단장, 이상일 변호사, 할머니들이 치열한 법리 싸움과 인권에 호소하는 다양한 전략으로 일본 법정에 맞서 싸우는 재판 장면은 점층적 긴장감과 함께 폭발력 있는 감동을 끌어낸다.

영화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탄탄한 내공을 내뿜는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완벽한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 연기를 펼치며 강인한 카리스마를 뽐낸 김희애, 증언석에 앉아 밑바닥에 쌓아두었던 한과 아픔을 폭발시키는 역대급 연기를 펼친 김해숙, 평양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거친 욕설과 행동으로 아픈 상처를 감추는 내면 연기를 소화해 낸 예수정(박순녀 역), 소극적이고 두려움이 많지만 결정적 순간 용기를 끌어내는 먹먹한 연기를 풀어낸 문숙(서귀순 역), 과거의 고통으로 마음의 병을 겪는 연기를 해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만든 신스틸러 이용녀(이옥주 역)까지 모두가 관록이 무엇인지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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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NEW(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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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문 단장은 “대체 왜 이 재판에 집착하냐”는 물음에 “부끄러워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재판을 통해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라고 위안한다. 이 대사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고백을 접하고 가슴에 돌멩이가 생겼고, 10년 전부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고민했다”는 민규동 감독의 연출 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관객이 느낄 다소간의 불편한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터다.

누군가는 “왜 또 위안부 영화냐”며 도리질을 칠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사회적 분투가 더 치열해져야 함을 ‘숫자’가 증명한다. 28명.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68명 중 남아 있는 생존자 수다. 올해 들어서만 4명의 할머니가 별세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 관객이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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