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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홍기영칼럼] 구본무 회장-영욕의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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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큰 별이 졌다. 재계 서열 4위 LG그룹의 총수, 구본무 회장이 5월 20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구 회장은 이웃집 할아버지같이 겸손하고 소탈한 경영인이었다. 그는 말단 직원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항상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작은 약속을 소중하게 여긴 그였다. 그는 누구와의 자리든 2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상대방을 기다리는 ‘20분 룰’을 지켰다. 바른 몸가짐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절제와 검소함의 미덕을 실천했다. 비싼 술도 즐기지 않았다. 경상도 사투리 섞인 유머로 대화 분위기를 살리며 환하게 웃는 그는 많은 경영인의 귀감이 됐다. 우리 사회 의인(義人)에 대한 보답을 체계화해 사회공헌에도 앞장섰다. 여의도 트윈타워에 둥지를 튼 황조롱이를 사랑한 그는 새 박사였다. 자신의 호를 딴 곤지암 생태공원 ‘화담숲’ 인근에 수목장으로, 그는 사랑했던 자연 품에 조용하게 잠들었다.

구 회장은 1995년 취임 당시 정도경영으로 초우량 기업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내세웠다. 그리고 고객 우선주의, 선제적 연구개발 투자, 창의와 혁신을 위한 인재 경영에 매진했다. ‘천년의 미소’로 불리는 신라시대 ‘얼굴무늬수막새’를 닮은 ‘미래의 얼굴’을 LG 심벌로 삼았다. 과감한 승부사인 그는 모토를 인화(人和)의 LG에서 1등 LG로 바꿨다. 매출 30조원의 그룹은 23년 만에 160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영욕의 세월이 지나갔다. 재임 시 구 회장은 몇 차례 위기를 맞고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반도체는 평생의 한(恨)이 됐다. 1999년 외환위기 때 애지중지하며 키운 LG반도체를 정부 압력에 반강제적으로 현대그룹에 빼앗겼다. 이후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매물로 나온 하이닉스를 인수하라는 권고에도 고집 센 구 회장은 끝까지 고개를 돌렸다. 결국 2012년 SK로 넘어간 하이닉스는 세계적인 메모리 호황에 올라타며 캐시카우로 부상했다. LG는 반도체 매각 대금으로 데이콤을 인수해 통신 사업에 진출, LG유플러스를 키웠다. 2002년 대선 때에는 다른 재벌과 함께 한나라당에 불법 대선 자금을 전달한 차떼기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2003년 말 국내 최대 LG카드가 부실에 빠진 카드 대란은 금융질서를 뒤흔들었다. 사태 수습 과정에서 구 회장은 LG카드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재를 털어 유동성 위기를 막은 뒤 2004년 LG투자증권·LG카드를 매각, 금융 사업을 모두 접었다.

LG그룹에서는 유독 ‘왕자의 난’이 없었다. 유교적 가풍에 따른 장자 승계 원칙과 지주회사 체제 조기 구축, 친족 집단 지배구조 등이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과 다툼을 사전에 차단한 배경으로 설명된다. 구 씨 가문은 LG에서 LS, LIG, 희성그룹 등 계열 분리로 형제간 불만을 흡수하는 완충장치를 마련했다. 돈 먹는 하마였던 2차 전지·디스플레이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과감한 결단과 끈기 있는 투자는 오너경영의 장점으로 꼽힌다. 3대에 걸쳐 57년간 동업한 허 씨 일가와 아름다운 이별도 빼놓을 수 없다. 구·허 양가는 외환위기 이후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잡음 없이 분할됐다. GS는 건설·정유·유통·홈쇼핑을 맡아 LG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LG그룹은 4세 경영인 구광모 시대를 열게 됐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에 이어 두 번째다. 재벌가(家) 경영 승계는 논란을 낳는다. 대기업 세습, 대물림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다.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젊은 후계자가 총수 자리에 앉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LG의 새 총수는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한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최선의 경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새 오너가 4차 산업혁명과 초연결시대를 헤쳐 나갈 리더십, 혁신정신, 돌파력을 발휘할지 모두가 주목한다.

[주간국장·경제학 박사 kyh@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60호 (2018.05.30~05.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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