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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전문기자칼럼] 기업미술관에 드리운 '리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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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거대한 달항아리가 뚝 떨어졌다. 단아한 듯 풍만한 자태, 다 내놓은 듯하나 결국 다 가진 소박한 세련미. 진짜 달이 질투할 만한 백자대호가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에 내려앉은 거다.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디자인했다는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얘기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달타령이냐고? 새 건물에 기꺼이 모델이 돼준 달항아리 ‘백자대호’(보물 1441호)는 아모레퍼시피미술관의 소장품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기업미술관에 본격 합류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로비와 지하에 3300㎡(약 900평) 규모로 자리를 잡았다. 엄밀히 말하면 개관이 아닌 이전이다. 창업주 서성환(1924~2003) 전 태평양 회장의 수집품을 쌈짓돈 삼아 1979년 동작구 대방동에 문을 연 태평양박물관이 모태다. 2005년 디아모레뮤지움으로 한 차례 개명했다가 2009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왔는데. 명칭뿐이 아니다. 1997년 경기 용인으로 옮겨갔던 것을 이참에 본사로 들여오며 기업미술관으로서의 상징성을 한껏 뽐낸 거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소장품은 5000여점. 주로 고미술품으로 보물급도 상당하다. ‘백자대호’를 비롯해 ‘수월관음도’(보물 제1426호), ‘분청사기 상감사각묘지 및 분청사기 인화문 사각편병’(보물 제1450호) 등이 우선 꼽힌다. 게다가 창업주의 막내아들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대를 이은 컬렉션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2016년 미국의 한 미술잡지가 선정한 ‘세계 200대 컬렉터’에도 들었으니. 미술관 측은 그 5000여점을 하나씩 꺼내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서 회장의 개인소장품과는 거리를 두겠다고 선을 그었는데. 과연 그 경계가 얼마나 명쾌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누구는 지각변동으로까지 보는 모양이다. 미술계 사정을 쥐락펴락할 재력의 사립미술관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 그런데 그 합격점을 따지는 잣대 말이다. 그것이 늘 삼성미술관 리움이라면. 리움의 소장품과 비교하고, 리움의 기획전에 빗대고, 리움의 컬렉션 능력에 대고 있다면.

근래 대기업이 미술관 운운하면 껌딱지처럼 따라붙는 두 시선이 있다. 하나는 소장품은 얼마나 가졌나, 다른 하나는 1년 넘게 개점휴업인 리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나. 두 시선은 사실 긴밀히 연결돼 있다. 리움의 파워는 단연 소장품에서 나오니까. 국보물급 150여점을 포함해 1만 5000점이라지만 얼마나 더 있을지는 가늠조차 안 된다. 한 해에 사들이는 미술품이 1000억원어치에 달한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렇게 막강한 컬렉터가 멈춰 섰으니 없던 걱정도 생길 판이다.

비단 아모레퍼시픽미술관뿐이겠나. 지난 1월 개관한 롯데뮤지엄 때도 이 잣대는 아주 유용했다. 소장품 없이 ‘맨땅에서’ 시작한다는 롯데뮤지엄을 두고 일찌감치 리움의 상대로는 밀어냈던 거다. 한쪽은 리움에 견줄 순 있을 듯, 다른 한쪽은 리움에 견주긴 힘들 듯.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다. 무슨 수를 써도 리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긴 어려운 구조인 거다. 눈이 번쩍할 전시를 내놔도 리움이 만든 그림판 안이다.

한국 미술계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받은 ‘예술품’이 더는 없을 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이들 미술관이 리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 의무가 있는가. 정작 염려할 건 기업미술관 태생이 가진 한계일 텐데. 오너가 정치나 사건·사고에 휘말려 미술관이 휘청하는 일 말이다. 예술의 다양성은 콩깍지를 씌운 편견을 벗겨내는 데서 나온다. 당장 리움의 그림자라도 거둬낸다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아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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