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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강병준의 어퍼컷] 규제공화국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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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신문

산업에서 규제는 '블랙홀'이다. 모든 이슈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다. 시장과 정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다. 기업이든 정부든 예외가 없다. 보수와 진보도 뛰어넘는다. 시장이 정답이라는 신자유주의 진영 프리드먼 학파든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스 학파든 목소리는 하나다. 규제는 혁신과 성장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암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산업계를 위한 모든 정부의 중점 국정 과제는 '규제 혁파'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하자마자 “과감히 규제를 풀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7일에 열린 '대한민국 혁신성장 보고대회'에서도 “혁신 성장 걸림돌인 규제를 개혁하는데 속도를 더 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힘을 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역대 정부가 '규제와 전쟁'을 선언했지만 정작 변한 건 없다. 승률이 참담하다. 백전백패 수준이다. 규제는 철옹성처럼 더 악화됐다. '손톱 밑 가시'를 철폐하겠다고 나섰다가 실패한 박근혜 정부가 결정판이다. 경제 대통령을 부르짖은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전봇대 때문에 트레일러가 못 다니는 게 말이 되느냐며 '규제 전봇대'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노무현 정부와 김대중 정부 역시 '규제 총량제'와 '규제 기요틴'이라는 용어를 써 가며 규제 완화에 나섰어도 큰 소득이 없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평범한 진실만 확인시켰다. 국어사전에서 규제는 '규칙이나 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음'으로 풀이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정 한도를 막거나 행위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결국 규제는 법의 다른 표현이다.

정말 그럴까. 현대경제연구원과 규제개혁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09~2016년 8년 동안 행정부에서 강화된 규제 건수가 8878건에 달했다. 연평균 1110건에 이른다. 8년 동안 신설되거나 강화한 규제가 9715건에 달했고, 규제위 철회와 개선 권고로 837건이 줄었다. 결과적으로 국회에서 통과된 입법 건수가 해마다 증가했다. 물론 입법이 모두 규제와 관련돼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은 기본적으로 국민이나 기업을 제약하는 성격이 강하다. 입법 건수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규제와 연관이 깊을 수밖에 없다.

입법 가운데에서도 의원 입법이 압도한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17대 국회 전체 입법 건수는 3773건에 불과했지만 19대에는 7429건으로 급증했다. 전체 법안 가운데 의원 입법이 차지하는 비중도 17대 59.3%와 18대 62.6%에 이어 19대에 72%로 늘었다. 지금 국회인 20대에도 72.1%로 급증, 늘어 가는 추세가 뚜렷하다. 결국 국회가 규제를 양산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공무원도 있다. 규제가 곧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공무원의 보이지 않는 관행도 규제공화국을 만드는 배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과 공무원이 석고대죄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국회의원 임무는 국민을 대표해서 법률을 제정하고 국정을 심의하는 일이다. 입법은 당연한 국회 기본 활동이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법에 따라 움직이는 공무원은 그저 법에서 규정한 일을 열심히 처리했을 뿐이다. 국회와 공무원 모두 맡은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규제가 많아지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해법도 참 난감하다. 일을 대충하라고 주문할 수 없다. 인원을 줄이거나 권한을 내려놓는 게 그나마 방법이다. 그럼에도 국회의원 권한은 더욱 막강해지고, 공무원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참 아이러니다. 규제공화국의 불편한 진실이다.

전자/산업 정책 강병준 총괄 부국장 bjk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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