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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사유와 성찰]양아치와 양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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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시대의 이야기다. 후일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서동요’를 지어 민심을 조작하는 데 성공하여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번역의 어려움은 있지만 그 노랫말은 풀어 전해지고 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려두고/ 막동집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과 바람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동네 아이들에게 흘려 진평왕으로부터 선화를 내어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으로 만들었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천년이 넘은 먼 옛적 언론 조작이라고도 할 수 있고, 민심의 향배를 귀담아듣는 군주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를 매번 전쟁으로만 학습한 우리들은 이러한 신라와 백제의 상황 묘사에 부딪히고 당황했던 기억도 난다.

경향신문

1970년대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아 민가에서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들이 많았다. 정부에서 지어 외우기를 강요하던 문구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리를 좋아했다. 그중에 자주 얘기되던 말이 ‘미국을 믿지 마라.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이 일어난다’이다. 무엇보다 음운적으로 말하기 좋다는 것도 있지만 민심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벌써 소련에 속아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서 속지 말아야 할 소련에 대한 경계심은 충분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고 하면서 1970년대에 최고의 번성기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상황이라서 일본이 일어난다가 아니라 당시 벌써 과거형이 되어 일본이 일어났다라고 해야 옳은 말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남은 믿지 말아야 한다고 한 미국을 보는 견해는 점점 극단으로 분리되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 극단의 지향은 멈추지 않는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까지 촛불 앞을 막아선 성조기 집회-태극기 집회라고 하기가 늘 너무나 거북스럽다-가 아직도 극성을 부리는 지경이다.

과연 미국을 믿고 함께할 우방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국가도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서 전체를 두고 모두 선과 악의 이분법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작금의 미국, 트럼프 행정부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의식이 콱콱 막히는 지경이다.

세상을 상대로 동네 아이들끼리 해도 욕먹음직한 일들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다. 경제와 관련된 무역문제부터 국가 간의 신뢰문제까지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우리의 정서적 말로는 ‘양아치 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냥 미국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세계 지성인들에게 침을 뱉는 기분이요, 인류가 이룩한 문화의 건전성을 일순간 함몰시켜버리는 몰상식한 언행과 결정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중국과 일본, 유럽과의 충돌 양상은 그래도 타국의 일이라 한발 물러나 어리둥절함으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어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회담 취소 공개서한은 세상을 향해 욕지거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더 많이 약속을 어겼는지 건건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어린 시절 배움이 많지 않은 우리 어머니들은 늘 한 살이라도 더 먹고 더 크고 더 배운 형에게 양보를 강요했고 그러한 배려가 약자인 동생들도 편안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대로 미국은 북한보다 천배 만배가 넘는 핵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위치에 있으면서 신뢰를 구축하고자 마지막 한발의 핵을 폐기하는 듯한 모습으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순간 이제 당신이 지켜야 할 신뢰에 침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풍계리 핵시설 폭파로 온 세상에 한편의 평화 축전을 타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모든 세계의 이성적 사고가 멈춰지는 듯한 순간이라고 해야겠다. 순간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가 입가에 맴돌았던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일부 언론들은 벌써 곤혹스러워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사를 내기도 하고 댓글들도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의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고 지지할 것이다. 정말 양아치와 양키는 어찌 어감도 그리 비슷한지 의리도 믿음도 없이 오직 한 끼의 밥을 위해 모든 사회적 통념과 가치를 함몰시켜버리는 양아치 짓을 일국의 대통령, 그것도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해서 될 일인가?

학창 시절 우리들은 ‘양키 고 홈!’을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이 순간에 맞닿고 보니 이 아침 그때 젊은 우리들의 외침이 맞다는 생각이 더 드는 건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성원 스님 신제주불교대학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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