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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1 (금)

안미현부터 심재륜까지...의외로 많았던 검사의 '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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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용진 기자] 지난 15일 안미현 검사의 ‘수사외압’ 폭로에 이어 양부남 검사장이 이끄는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단’의 ‘항명’이 이어지면서 ‘사상초유의 사태’라는 수식어를 단 보도들이 쏟아지고 있다. ‘말석 검사가 검찰총장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검사장이 대놓고 총장의 지휘에 항명하고 있다’며 혀를 차는 모습도 보인다.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원칙을 앞세웠던 검찰의 기존 이미지와 크게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 파문을 던진 항명파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심지어 자주 발생한 적도 있다. 가깝게는 지난 2013년 ‘윤석열 항명파동’이 있었고, 멀리는 1999년 ‘심재륜 항명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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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윤석열 항명파동

지난 2013년 10월 17일.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맡은 특별수사팀은 결재권자인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의 승인없이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 3명을 체포해 조사를 벌였다. 특별수사팀은 하루 전날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지만 조 지검장은 물론 이진한 중앙지검 2차장검사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뒤이어 수사팀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이종명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심리전단장에 대한 공소장 변경을 신청, 새로 발견된 5만5000여건의 정치개입 댓글을 공소사실에 포함시켰다.

뒤늦게 국정원의 항의를 받고서야 사태를 파악한 조 검사장은 노발대발했고 곧바로 윤석열 수사팀장 등 수사팀 주요간부들을 직무에서 배제시킨 뒤 징계에 회부했다. 얼마 뒤 열린 국회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윤 검사는 “검사장에게 보고했지만 ‘야당에게 좋은 일 시켜줄 필요있느냐’며 반려했다”면서 “위법적인 지시였기 때문에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라는 등의 폭탄발언을 쏟아냈다.

이 일로 윤 검사는 당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됐지만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받고 박근혜 정권 내내 한직을 떠돌아야 했다.

■대검차장과 중수부장의 반란...‘검란’사태


하지만 '진짜' 검란은 이보다 1년 앞선 2012년 11월에 벌어진다. 당시 검찰은 잇따르는 추문에 휘청이고 있었다. 검찰 고위직인 김광준 검사의 비리사건에 이어 이른바 ‘섹검’ 전모 검사 사건까지 잇따라 불거졌다. 추문이 잇따르자 검찰총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검찰내부에서도 여론이 비등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당시 대검 중수부장 최재경 검사장은 안팎의 여론을 한상대 당시 검찰총장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보고내용에 격노한 한 총장은 도리어 최 검사장을 감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비리혐의를 받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를 하는 등 의혹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감찰본부는 총장의 명령을 거부했고, 오히려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검차장이던 채동욱 검사장을 중심으로 집단 항명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검찰사상 유일무이한 ‘검란사태’의 시작이다.

검란사태는 한상대 검찰총장이 스스로 물러나면서 마무리됐다. 한 총장이 물러난 뒤 최재경 검사장도 사직서를 냈지만 사표가 반려되면서 복귀했다. 최 검사장은 2014년 인천지검장으로 복귀했지만 세월호 실소유주 수사 당시 유병언 추적에 실패하는 등 수사실패 책임을 지고 검찰을 떠나게 된다.

■심재륜 항명파동

‘검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99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법조계는 이른바 ‘대전 법조비리’ 사건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당시 대구고검장이던 심재륜 검사장 등 전현직 판검사들이 줄줄이 지역 거물 변호사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에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은 심 전 고검장을 비롯해 사건에 연루된 검사 전원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심 고검장은 곧바로 대구에서 상경,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연다. 그는 ‘국민 앞에 사죄하며’라는 성명서를 통해 “검찰 수뇌부가 위기 모면을 위해 후배 검사들을 희생양으로 만든다”며 검찰 수뇌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날 그의 입에서는 ‘정치권력의 시녀화’ ‘정치권력에 영합하는 집단’이라는 강도 높은 비난이 쏟아졌다.

발끈한 검찰 수뇌부는 징계위원회를 열고 '근무지 이탈'로 파면했다. 정작 금품수수 혐의는 징계대상에서 빠졌다. 그가 징계를 받자 그를 따르던 후배 검사들은 집단 서명운동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한편 심 고검장은 나중에 복직소송에 승소해 검찰로 복귀한 뒤 퇴임했다.

■강정구 교수 사건, 채동욱 '호위무사' 사건 등등

2005년에는 법무부와 검찰이 충돌한 사건도 있었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통일전쟁”이라는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던 강정구 교수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강 교수를 구속하려 했지만 법무부는 이에 반대했고, 결국 장관이 정식으로 수사지휘권을 발동, 불구속 수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었고, 당시 김종빈 검찰총장은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검사들의 항명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정치권 안팎에서는 때아닌 이념논쟁이 일기도 했다.

1인 항명이 생각보다 큰 파문으로 이이지기도 했다. 2013년 9월 ‘차라리 전설 속의 영웅 채동욱의 호위무사로 남겠다’는 글을 검찰 내부전산망에 남기고 사표를 던진 김윤상 당시 대검 감찰과장이 대표적이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를 밀어붙이고 있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의혹으로 물러난 것에 항의한 사건이다.

당시 김 전 감찰과장이 사표를 던진 것이 계기가 돼 전국의 평검사들이 긴급모임을 열기로 하는 등 이른바 ‘검란’조짐이 일기도 했고, 일부에서는 이때를 ‘제2차 검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밖에 대규모 항명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2011년 검·경수사권조정에 반발해 홍만표 대검 기획부장 등 검사장급 5명이 집단사표를 낸 항명사건, 정태수 한보그룹 전 회장 수사와 관련한 일선 수사검사의 반발 등 적지 않은 항명파동이 검찰사에 기록돼 있다.

또 집단항명은 아니지만 2009년 '광우병소' 보도를 낸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기소를 거부한 임수빈 전 부장검사와 윤길중 재심사건에서 지시를 어기고 무죄를 구형한 임은정 검사 사건등 1인 항명사건도 적지 않다.

장용진 기자 ohngbear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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