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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박수찬의 軍] “그 많은 국방비, 우리 군인들이 떡 사먹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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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배도 훨씬 넘네요. 열배도 훨씬 넘는데, 이게 한해 두해도 아니고 근 20년간 이런 차이가 있는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한국의 국방력이 북한보다 약하다면 70년대 어떻게 견디어왔으며,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 먹었느냐. 옛날에 국방장관들 나와서 떠드는데 그 사람들 직무유기한 것 아니에요. 그 많은 돈을 쓰고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직무유기 한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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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6년 12월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 연설에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국방개혁 2020에 반발하던 예비역 장성들을 겨냥해 ‘작심발언’을 쏟아냈다. ‘핵직구’ 수준의 강도 높은 연설에 당시 예비역 장성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을 대변하는 ‘사이다’ 연설로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18년의 현실은 어떨까.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우리가 북한 군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합 방위능력에 의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해 8월 28일 국방부 업무보고 발언을 듣고 노 전 대통령의 12년 전 발언이 떠올랐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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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구룡 다연장로켓이 가상 표적을 향해 발사되고 있다. 육군 제공


◆떡 사먹지 않았다. 지출 방식이 문제였다

노 전 대통령 말처럼 우리 군인들이 국방비를 떡 사먹는데 다 썼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군은 수십년 동안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전력증강을 지속해왔다. 그럼에도 군이 북한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확보했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산 지출과 정책 기획 방식 때문이다.

군에서는 예산 지출 및 정책 기획 과정에서 위협기반(threat based)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위협기반 방식은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을 설정하고, 적의 무기체계와 군 구조 등을 파악해 그보다 우수한 군대를 만드는 개념이다. 주기적으로 전쟁 시나리오를 점검하면서 새롭게 입수한 정보를 반영해 적의 위협 요소를 다시 식별하고, 새로운 위협이 등장하면 그에 대응하는 전력증강 사업을 실시한다. 우리 군도 키 리졸브(KR)를 비롯한 가상 워게임을 통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 수준을 측정하고 전력 증강 요소 식별에 활용한다.

위협기반 방식은 군 당국자들이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적과의 1:1 비교를 통해 보완해야 한다고 판단되는 분야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투자와 정책 기획 방향을 설정하는 기준이 적의 위협뿐이라 국민들에게 투자의 당위성을 설명하기도 쉽다. 적군에 비해 아군의 전력이 열세이므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을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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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비호 박합대공화기체계가 공중의 표적을 형해 기관포를 발사하고 있다. 육군 제공


위협기반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적의 위협이 변화하면 아군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적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달성하기 어렵다. 남북간의 군사력 경쟁 역사를 살펴보면 위협기반 방식의 문제점이 확실히 드러난다. 우리 군은 북한이 전차를 도입하면 기갑부대를 늘리고, 자주포를 배치하면 자주포를 대량생산했으며,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면 탄도미사일과 탐지 요격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렇게 북한의 전략을 쫓아가는 추격자 역할에 머물다보니 군은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북한보다 군사력이 우세하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진다.

적의 위협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지 못할 경우 시간과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러시아가 1970년대 배치한 미그-25 전투기는 미국의 XB-70 전략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해 개발된 항공기였다. 하지만 미국이 XB-70 프로그램을 취소하면서 미그-25의 가장 큰 임무는 사라져버렸다.

적의 위협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면 아군의 전력 증강 방향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이 커지자 군은 한국형 3축 체계(킬 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 대량응징보복)를 구축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하지만 한국형 3축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기도 전에 북한 비핵화 가능성이 커지자 10조원을 투입,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차단하겠다는 군의 3축 체계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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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에서 해병대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주관으로 2017년 9월 7일 계속된 서북도서방어훈련에서 해병대 6여단 장병들이 적 침투상황을 가정해 훈련하며 상륙돌격장갑차에서 하차해 이동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나라 지키는데 필요한 능력에 초점 맞춰야

위협에 대응하는 수동적 방식의 단점이 부각되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능력기반(capabilities based) 방식이다. 국가 안보에 필요한 군사적 능력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에 걸맞는 전력증강 계획을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추진하는 능력기반 개념은 2000년대 초 미군의 혁신을 부르짖던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당시 미군은 냉전 종식으로 러시아의 위협이 크게 줄어들자 다양한 위협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능력기반 방식은 어떤 형태의 위협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조 추첨 전까지는 조별예선에서 상대할 국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선수의 체력과 개인기, 팀 전술 등을 연마하다가 조별예선 상대국가가 정해지면 그에 맞는 능력을 선별해 대응한다.

능력기반 방식의 전력증강도 이와 같다. 국가 안보에 필요한 능력을 확보하면서 유연성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므로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할 우려가 낮다. 반면 사회적 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미래 국방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게 쉽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국방개혁 2.0을 통해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하는 군 당국의 입장에서 능력에 기반한 예산 투자와 정책 기획 수립을 국방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를 바탕으로 북한 비핵화와 6.25 전쟁 종전선언, 평화협정 체결이 이뤄지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크게 낮아진다. 60여년 동안 휴전선 너머에 자리잡고 있던 주적(主敵)이 사라지는 셈이다. ‘북한은 남침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전제 하에 수십년간 지속된 위협기반 예산 투자나 정책기획 방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민주주의 의식 강화도 기존 방식을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북한 위협이 컸을 때는 국가안보를 위해 소수의 엘리트들이 전력증강 계획을 수립해 추진해도 국민들이 용인했지만,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면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민주주의에 기반해 국방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일반 국민 등-간의 합의에 의한 전력 투자와 정책 추진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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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이 훈련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해군 제공


군 입장에서는 이같은 변화와 혁신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처럼 북한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이 제2의 창군으로 나아갈 기회다. 럼스펠드 장관의 능력기반 예산 투자와 정책 기획 방식은 냉전 종식으로 주적을 잃어버린 미군을 21세기 다양한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전력증강=무기도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창의적인 작전계획 수립과 조직개편 등을 통해 절감한 예산을 꼭 필요한 분야에 투자해 ‘선택과 집중’을 했다. 그 결과 미군은 냉전 시절보다 환경이 열악해졌음에도 강도 높은 국방연구개발과 전력증강을 추진할 동력을 얻었다. 네트워크중심전(NCW), 비(非)전투기능 아웃소싱, 사이버전, 무인공격기, 육해공군 합동성 등 최근 서방 세계 군대에서 볼 수 있는 혁신 트렌드들은 미군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현재 국방부는 문 대통령의 공약을 반영한 국방개혁 2.0의 최종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장군 정원을 70~80여명 줄이고 국방부 직할부대를 조정하는 등의 개혁 과제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군의 본질이 무엇인가. 국토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국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 국방개혁 2.0에 반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감소하는 상황을 잘 이용해 군의 본질부터 뒤엎는 혁신을 하지 못할 경우 우리 군은 표범같은 군대가 아닌, 공룡같이 둔하고 거대한 ‘돈 먹는 군대’로만 남게 될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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