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4 (화)

평등이냐 경쟁이냐…프랑스 대입제도 개편 두고 갈등 격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부 "중도낙오로 사회비용 커"…국립대에 반세기만에 사실상 학생선발권 부여

학생들 "프랑스의 자랑인 평등주의 교육 원칙 훼손" 반발…동맹휴업·점거농성

연합뉴스

[연합뉴스 자료사진] 프랑스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대학교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프랑스 사회의 '평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국립대 입학제도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면서 프랑스 대학교육이 파행을 빚고 있다.

대입제도 개편을 추진하는 정부는 대학의 학생선발권을 보장하는 등 경쟁을 도입한다는 구상이지만, 학생운동권과 좌파진영은 프랑스의 자랑인 평등주의 교육을 미국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장 조레스 대학에서는 두달간 학교 점거시위를 벌여온 학생들을 9일 새벽(현지시간) 경찰 200여 명이 진입해 강제 해산했다.

파리의 국립대 13곳 중 한 곳인 8대학의 캠퍼스는 몇 주째 수업이 올스톱됐다. 지난주 스트라스부르에서는 학생들의 점거농성으로 700명의 학생이 시험을 치르지 못했고, 낭시에서는 학생들의 교양영어 시험 진행을 위해 경찰이 캠퍼스에 진입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의 학교 점거시위가 3월부터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지면서 학장들은 임시로 시험을 치를 공간을 구하느라 백방으로 뛰고 있다.

동맹휴업에 동참하지 않은 학생들은 강의실을 떠나 학생식당이나 캠퍼스와 멀리 떨어진 교외에 임시로 마련된 곳에서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필기시험을 온라인 시험으로 대체하거나 아예 시험을 무기한 연기하는 대학들도 많다.

이처럼 프랑스의 대학교육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는 것은 학생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입제도 개편 구상에 반발해 대규모로 동맹휴업과 점거농성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동안 프랑스에서는 대입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 합격한 고교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국립대에 진학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합격률은 80%에 육박하며 국립대 등록금은 국가가 대는 무상교육이다.

마크롱 정부는 그러나 지원자가 정원을 넘겨 몰리는 국립대가 무작위 추첨으로 학생을 선발하던 방식을 폐지하는 대신, 대학이 자체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권한을 부여하기로 했다.

성적과 활동기록 등을 참고해 학교 측이 지원자의 입학, 조건부 입학, 불합격을 가리도록 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졸업 전 중도에 낙오하는 비율이 너무 높고 인기 전공에 학생이 지나치게 몰려 교육의 질이 저하되는 등 사회적 비용이 과도해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의과대학처럼 인기가 높은 전공일수록 중도낙오 비율은 매우 높다.

영·미권이나 한국과 비교하면 프랑스의 학생선발권 확대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1968년 5월 학생운동 이후 정착된 현 시스템이 매우 공고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파리 시앙스포 학생들의 학교 점거시위
[AFP=연합뉴스]



과거에도 정부가 대학별 선발시험을 치르는 방안을 도입하려 한 적이 있지만, 번번이 무산될 만큼 프랑스의 현 대입제도는 견고하게 유지돼왔다.

이번에도 누구나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축소하려고 하자 좌파진영과 학생들은 프랑스의 전통인 평등주의적 교육원칙을 깨려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대입제도를 개편하면 가난한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될 자유가 없어져 사회 이동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근에는 일반 국립대 학생들뿐 아니라 정부의 대입제도 개편과 관계없는 그랑제콜(소수정예 엘리트 특수대학) 학생들도 동참하면서 저항의 분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다녔던 그랑제콜인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 파리 캠퍼스가 학생 점거시위로 폐쇄된 데 이어 최근에는 사르트르와 푸코 등 사상가들을 다수 배출한 프랑스의 최고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학생들도 학교를 점거했다.

프랑스 평등교육의 예외이자 엘리트교육의 산실인 그랑제콜은 일반 국립대와 다른 트랙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따라서 이들은 대입제도 개편과는 상관이 없는데도 다른 학생들과의 '연대' 차원에서 시위에 나섰다.

일부 대학 교원들도 학생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68년 5월 이후 탄생한 뱅센실험대학의 후신인 파리 8대 교원들은 대입제도개편에 반대하는 의미로 자신이 맡은 강좌의 시험을 취소하거나 모든 수강생에게 동일한 점수를 주기도 했다.

학생시위에 동조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마크롱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일부 대학들에서는 학생들이 점거한 강의실에 밤중에 복면한 괴한들이 난입해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한밤중에 학생들을 상대로 한 화염병 공격이 발생하는 등 갈등도 격화하고 있다. 경찰과 학생들은 이를 학생시위에 반대하는 극우단체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맹휴업과 점거농성을 둘러싸고 학생들은 치열한 토론을 하고 점거시위를 풀기도 하지만 여전히 대입제도 개편을 둘러싼 진통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전국 70여 개 국립대 중 4곳이 완전히 폐쇄된 상태다.

프랑스 정부는 대입제도 개편에 양보는 없으며 점거시위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입장이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지난달 25일 대학 학장들을 접견하고서 "대학이 급진적인 그룹에 점거되고 시험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엄정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yonglae@yna.co.kr

연합뉴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P=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