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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르포]부녀회장 전관예우 안해줘서? '해맞이' 명소 호미곶 덮친 '농약 고등어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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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버, 무섭지. 내 나이 아흔 넘게 묵었어도 이런 일은 또 처음인기라. 아덜(자녀들)이 계속 괜찮으냐고 전화 오고…” 마을 주민 하모(92)할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하 할머니는 이날 구만1리 마을회관에서 ‘심리 치료’라는 걸 받았다. 보건소 등에서 심리치료사 등 15명이 찾아와 주민 30명이 상담을 받았다. 아흔 해 넘어 이런 일을 처음이었다.

연말연시 ‘해맞이’ 인파가 몰리는 포항시 호미곶.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미곶면 구만리는 21일 이후 불안에 빠져들었다. 지난 21일 발생한 이른바 ‘농약 고등어탕’ 사건 때문이다.

21, 22일 ‘돌문어 축제’ 때 주민들에게 제공하려고 마을부녀회에서 90인분에 달하는 고등어추어탕을 끓여 마을회관에 놔뒀는데, 여기에 누군가 벼멸구 방지 등에 쓰이는 농약 ‘엘산’을 탄 것이다. 수색 14시간 만에 마을 부녀회장을 지낸 이모(68)씨가 긴급 체포됐다. 이씨가 진술한 범행동기는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였다.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 발생 사흘째인 지난 24일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1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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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4시쯤 포항시 호미곶면 구만1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이다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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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률 12.71% 살충제, 고등어탕에 뒤집어진 ‘구만1里’
A씨는 사건 당일 국솥을 열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여겨 한 숟갈 떠먹었다가 이내 뱉었다. 병원에 이송됐다가 간단한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그러나 이후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24일 그녀도 마을회관에 나와 심리치료를 받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집에 있겠는데 뭐 하나에 집중할 수가 없어. 지금 이래 말하는데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가…” A씨 남편은 충격을 받아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근래 경찰과 기자들이 자주 다녀갔다고 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서모(56)씨는 “사흘 내내 마음이 뒤숭숭하고...뭐 하나 제대로 먹겠습니까”며 ”우리가 그걸(고등어탕) 먹었으면 다 갈 뻔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됐다. “고등어탕에 살충제(엘산) 50㎖를 탔다”고 진술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살포량은 150㎖로 드러났다. ‘엘산’은 사망률 10% 조금 넘는 수준으로 ‘저위험도’ 농약에 속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 충격이 덜 한 것은 아니다.

‘농약 고등어탕’ 사건이 인명 피해를 낳지 않은 것은 ‘악취’ 때문이었다.
‘죽음의 농약’으로 불리는 그라목손의 경우, 해마다 이로 인해 숨지는 사람이 2000명이 넘었다. 무색무취해 살인 도구로, 자살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2011년 결국 생산이 중단됐다.
2015년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이후, 농약 제조업체들이 인위적으로 악취 성분을 집어넣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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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추어탕에 들어간 살충제 ‘엘산’(왼쪽)과 탕을 끓였던 냄비./한국삼공 제공, 김유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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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회장 전관예우가 부른 참극? 글 몰랐던 이씨 “날 무시한다”
“뉴스에 ‘왕따’라고 나오던데 그런 일은 없어예. 이해가 안 갑니다.” 주민들은 이씨가 “소외감을 느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서모(82)할머니 얘기다. “귀신에 씌었다면 모를까. 평소에 할매, 할배를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다카이.”

포항 남부경찰서에 따르면 구속된 이씨는 전(前) 부녀회장이었다. 앞서 3년간 임기를 마치고, 올해도 마땅한 후보가 없어 연임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달 회원들과의 갈등이 빚어지자 부녀회장을 그만뒀다고 한다. 이씨는 범행동기에 대해 “부녀회가 나를 무시하고, 소외해서 화가 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이씨 임기가 지나고, 새로 부녀회장이 안 뽑혀서 3개월도 더 했는데 후임자들이 처우를 제대로 안 해준 거죠. 새로 뽑힌 부녀회 ‘집행부’가 본인을 찾아와서 (깍듯하게) 인사도 하고 밥도 사주고 안부도 묻는 ‘전관예우(前官禮遇)’를 해주길 원했는데...본인 말로는 축제에 불러주지도 않고 인사도 본체만체하고 그랬답니다. 부녀회원들이 자기한테 돈 정산 문제나 부녀회일을 잘 보고하고 그러길 원했는데 그렇게 안 하니까 점점 서로 불만이 쌓여 사이가 틀어진 거죠.”

주민들과 경찰에 따르면 이씨가 본인 이름 석 자는 썼지만, 글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부녀회원은 “부녀회 하다 보면 글로 적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던 모양”이라면서 “그러다 보니 이씨가 ‘내가 글을 모르니까 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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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 고등어추어탕에 살충제를 섞은 이유는 부녀회원 간의 불화였다. 사진은 구만1리 마을회관 입구./김유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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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이다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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