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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박수찬의 軍] 과거 정책 재활용해놓고 개혁 외치는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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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당국은 사회적으로 개혁 요구를 받아온 군 사법제도를 개선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시감(旣視感). 심리학적 용어로 데자뷔(dejavu)라고도 하는 이 감정은 처음 오는 곳, 처음 대하는 장면,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을 설명하는 단어다.

문학에서는 낭만적인 요소로 쓰이지만 정부 정책에서는 상황이 발생하면 등장하는, 늘 똑같은 대책의 반복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느낌이다. ‘복붙’(복사해서 붙여넣기), ‘컨트롤(Ctrl)+C/V’식으로 과거 정부의 정책을 재탕하거나 현재 시점에 맞게 살짝 바꾸는 행위는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국방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가 국방개혁 2.0을 선언하며 개혁 작업에 착수하자 군 안팎에서는 “노무현정부 당시 추진한 개혁에 포함됐던 방안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무성했다. 국방부가 국방개혁 2.0의 일환으로 지난 2월 발표한 군 사법제도 개혁은 이같은 평가가 근거 없는 추정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군 사법개혁안, 참여정부 정책 ‘재탕+수정’

노무현정부가 추진했던 군 사법개혁은 사법부를 대상으로 한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2005~2006년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국방부와의 논의를 거쳐 확정한 군 사법개혁안은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만든 백서에 논의과정과 결과가 상세히 기록됐다. 결과물은 △군인사법 일부개정 법률안 △군사법원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군검찰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군형사소송법안 △장병 등의 군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안으로 정리되어 국회에 제출됐으나 2008년 5월 17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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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국방부 경내에 위치한 고등군사법원 대법정. 연합뉴스


본지가 지난 2월 국방부가 발표했던 군 사법개혁 22개 과제와 노무현정부의 군 사법개혁안을 비교해본 결과 노무현정부 개혁안과 동일하거나 일부 수정된 채 개혁과제에 포함된 것들이 적지 않았다.

국방부가 군사법원 독립성 강화를 위해 추진한다고 밝혔던 평시 관할관 확인조치권(지휘관의 형량 감경권) 및 심판관(지휘관이 일반 장교를 재판관에 임명하는 권한) 제도 폐지, 국방부 직속 군사법원을 설치하고 군사재판 1심을 5개 지역군사법원이 담당하되 장병 편의를 위해 순회재판을 실시한다는 내용은 13년 전 노무현정부 당시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의결한 개혁안의 핵심이다. 2005년 12월26일 국회에 제출된 ‘군사법원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3조, 4조, 6조, 7조 등에 관련 내용이 포함되기도 했다.

군판사 임용 등을 다룰 군판사인사위원회 설치, 5년마다 군판사 재임용 실시는 ‘군사법원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23조와 26조에 포함되어 있다. 지역군사법원장에 민간 법조인을 임명한다는 것 역시 ‘군사법원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21조와 기본 취지가 같다. 장병 참여재판제도 시행 검토는 2006년 1월 5일 국회에 제출된 ‘장병 등의 군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안’과 다르지 않다.

각 부대 검찰부를 폐지하고 참모총장 소속 검찰단을 설치한다는 방안은 노무현정부 당시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국방부 직속 검찰단 신설을 검토하자 국방부가 절충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국방부 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이 군검찰에 대해 구체적인 지휘권 행사를 제한하는 방안도 2005년 12월 26일 국회에 제출된 ‘군검찰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7조의 내용을 일부 변형한 것이다. 중요 범죄 발생 시 군사법경찰이 군검찰에 통보하도록 의무화하고 군사법경찰에 대한 군검찰의 직무감찰, 징계 요구 등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2006년 1월5일 국회에 제출된 ‘군형사소송법’ 202조, 203조, 265조, 266조와 매우 유사하다.

노무현정부 개혁안보다 후퇴한 사례도 있다. 군판사를 현역으로만 유지한다는 방침은 민간 변호사에게도 군판사 자격을 부여한 ‘군사법원의 조직 등에 관한 법률안’ 21조보다 후퇴한 것이다.

군 항소법원을 서울고등법원으로 이관하고 헌병병과 병사를 군무이탈 체포조 등에 투입할 수 없도록 하며, 영창을 폐지하고 군 범죄피해자에게 국선변호사를 제공하는 것 등은 노무현정부 개혁안보다 진전된 부분이다. 상급자의 부당한 지휘에 대한 군검사의 이의제기권 부여, 군검사 교체요구권 도입, 헌병 활동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등은 현 정부에서 새로 도입됐으나 일부 과제는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실현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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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7월 30일 공군 패트리엇 포대를 방문해 부대 현황을 보고받고 있다. 국방부 제공


◆재탕해도 좋으니 이행을 하라

노무현정부에서 추진됐던 군 사법개혁안이 13년만에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9년 동안 군 사법개혁에 대한 국방부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정부 당시 국방부는 군무회의와 정책간담회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사법개혁추진위원회와 논의를 거쳐 군 사법개혁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군 특수성을 고려치 않았다” “지휘권을 침해한다”는 군 내부 비판이 힘을 얻으면서 노무현정부의 군 사법개혁은 국방부 내에서 소리없이 사라졌다.

노무현정부 시절 군 사법개혁에 반대하는 근거였던 ‘군의 특수성과 지휘권 보장’이라는 개념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군 사법개혁 요구를 저지하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했다. 2014년 4월 육군 28사단 윤일병 집단 폭행 사망사건으로 군 사법개혁 요구가 분출했을 때도 국방부는 똑같은 논리를 내세워 개혁에 저항했다.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이 2014년 9월 작성한 ‘군 사법제도 이해 및 주요 쟁점’ 자료를 보면 군 수뇌부가 사법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군 사법제도 운영을 통해 전투력 발휘를 위한 인적통제 및 군기 확립과 군 지휘권을 보장했다”고 명시한 이 자료는 군 사법제도의 근본적 개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평시 군사법원 폐지와 민간인 군판사 도입에 대해서는 “안보상황과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군사법원을 지휘계통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휘권 확립을 이유로 반대했다. 대표적 독소조항인 관할관, 심판관 제도 폐지에 대해서는 1996년 헌법재판소 판례를 들어 거부했다. 노무현정부 시절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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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7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 군판사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발언자의 발언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제공


군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갈수록 거세지자 정부는 국회 심의를 거쳐 2016년 1월 군사법원법 개정안을 공포했다. 이에 따르면 관할관 확인조치권은 ‘성실하고 적극적인 임무수행과정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 형량의 3분의 1 수준에서만 적용하고, 심판관 제도는 ‘군사범죄 중 고도의 군사적 전문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사건’에 한해 운영하도록 했다. 전면 폐지를 요구해온 법조계와 시민사회단체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국회 안팎에서는 “군의 반대가 완강해 폐지에 실패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미완의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군사법원법 개정안은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뒤인 지난해 7월 시행에 들어갔다. 서주석 국방부 차관은 “장병과 국민의 여망과 염원을 담은 진일보한 개혁”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국방개혁 2.0에 의해 뒤집히기까지는 8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국방부는 지난 2월 군 사법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장병들이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서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군 전투력 유지의 수단으로 사법제도를 바라봤던 박근혜정부 시절에 비해 많이 발전한 부분이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지 20년이 지났고, 10여년 전 노무현정부 시절의 군 사법개혁안을 국방부가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군 사법제도가 여전히 ‘응답하라 1988’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다. 국방부는 나름대로 야심차게 사법개혁을 하겠다고 나섰을 수 있지만 청와대가 지난달 개헌안을 발표하면서 국민 기본권 보장 차원에서 평시 군사재판을 폐지한다고 밝힌 것은 군 사법개혁을 둘러싸고 군 안팎의 시각차가 크다는 증거다.

일각에서는 군 사법개혁이 노무현정부 시절처럼 군 내에서 강한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러나 촛불혁명을 겪었던 지금은 그 이전과는 군 내 의식도 환경도 다르다. 군 사법개혁에 대한 저항의 강도도 노무현정부 시절보다 낮아졌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현 정부 임기 안에 국방개혁 2.0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군 사법개혁을 완수할 최적의 기회가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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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30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군대는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장병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헌법의 보호를 받는 국민이다. “군대는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곳”이라는 오명은 들을 만큼 들었다. 군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도 겪을 만큼 겪었다. 정책을 재탕, 삼탕을 해도 좋으니 국방부가 스스로 밝힌 군 사법개혁안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 이유다. 정권 초인 현재 시기에 개혁을 하지 못하면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개혁을 휘황찬란하게 홍보하는 것보다 개혁과제를 한 가지라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군인은 입이 아닌 행동으로 말한다”는 말을 국방부가 명심해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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