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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반공국가 총리가 된 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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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⑫ ‘푸파약 기념관’에서 돌아본 부자의 일생


한겨레

타이공산당 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던 아버지 파욤 쭐라논을 추모하기 위해 반남리 팟타나의 푸파약기념관을 찾은 수라윳 쭐라논 전 총리. 푸파약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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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중순쯤이었다. 16일 육군총장 손티 분야랏깔린이 탱크를 몰고 나와 탁신 친나왓 정부를 뒤엎고 민주개혁평의회를 선포한 바로 뒤였다. 일찌감치 기자들 사이에는 손티가 쿠데타 정부 얼굴로 수라윳 쭐라논 전 합참의장을 내세울 것 같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즈음 정보를 쫓아 외신기자 친구들도 뻔질나게 몰려다녔다. 손티의 첫 기자회견을 취재했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친구들이 커피숍에 둘러앉았다.

“육군사관학교 입학할 수 있을까?” “육군총장 될 수 있을까?” “총리 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물음에 다들 똑같은 답을 내놨다. “절대 안 된다.” 이건 예컨대 아버지가 공산당 최고지도자였다 치고 그 아들의 일생을 따져본 이야기였다. 민주주의 어쩌고들 하지만 아시아나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소문대로 10월1일 수라윳이 임시정부 총리로 나타났다. 수라윳은 타이공산당(CPT) 무장조직인 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던 파욤 쭐라논의 아들이다. 이 세상 어디서든 “절대 안 된다”는 그 일이 타이에서 벌어졌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반공국가에다 입헌 군주가 현실 정치 속에 살아 있는 사회에서 말이다. 수라윳 아버지가 파욤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던 게 1998년이었다. 육군총장 후보로 그이 이름이 오르내렸을 때다. 그 일로 나는 한동안 타이 사회를 읽는 데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지금도 헷갈리긴 마찬가지지만.

공산당 무장투쟁 최후 요새였던 푸파약

아버지와 아들의 일생을 화두로 잡고 반남리 팟타나를 찾아간다. 소금우물로 이름난 보끌르아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라오스 국경을 오른쪽에 끼고 지방도 1081을 따라 북으로 달린다. “여기서 60킬로미터쯤 가면 반후아깐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와. 거기서 또 3킬로미터쯤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보끌르아에서 소금꾼 마 욧와릿이 일러준 대로 왔지만 이정표도 집도 사람도 없는 산속에서 길을 찾는다는 게 만만찮았다. 오른쪽으로 꺾는 지점을 못 찾아 10킬로미터쯤 산길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던 끝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사냥꾼을 만나 1307 샛길을 찾아냈다. 이 길이 반남리 팟타나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1307 샛길은 이번 국경 여행에서 받은 첫 저주였다. 어디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아스팔트가 모조리 벗겨진 길바닥을 요리조리 피해보지만 자동차는 튕기듯 달린다. 2007년 반남리 팟타나를 찾았던 적이 있다는 나만 믿고 운전대를 잡은 통역이 시무룩해졌다. “삼거리에서 반남리 팟타나까지 15분이면 되고 길도 멋지다고 하더니?” 그땐 그랬다. 그 시절은 수라윳이 쿠데타 정부 총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총리가 몸소 아버지 자취를 찾아왔던 마을이었으니 길 닦는 공무원들이 어련했겠나.” 그제야 통역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폈다. 아마도 2008년 수라윳이 물러난 뒤론 이 길을 아무도 손보지 않았던 듯싶다.

산골마을 구석의 공산당 기념관
평일인데도 문 닫히고 관리자도 없어
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던 파욤 쭐라논 추모
“파욤은 심장과 말이 같았던 지도자”

아들 수라윳, 임관 직후 반공전선 투입
부자가 한 전선에서 적으로 싸워
2006년엔 쿠데타 정부의 총리로
“내게 아버지는 영웅이다”


그렇게 기껏 17킬로미터 길을 달리는 데 꼭 1시간이 걸렸다. 라오스 국경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산골마을 반남리 팟타나는 1984년 공산당원 400여명이 삶터를 다진 마을이다. 1981~1983년 사이 타이공산당 주류가 투항하면서 무장투쟁이 시들해진 때였다. 현재 100여 가구에 600여 주민을 거느린 이 마을은 1500미터 산악 푸파약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호랑이가 들끓는 엄청나게 큰 산이란 속뜻을 지닌 푸파약은 예부터 라오스 쪽에서 건너온 소수민족 루아(Lua)와 몽(Hmong)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경계인으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온 그이들이 바로 타이 북부지역 공산당 무장투쟁에 동력을 댄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이 푸파약은 1970년대 타이공산당 제708 본부로 북부지역 무장투쟁의 최대, 최후 요새였다.

전통적으로 양귀비를 키웠던 이 지역에는 2003년 대체 작물 개발과 옛 공산당원 사회 복귀 지원을 내걸고 ‘푸파약 로열프로젝트’가 들어섰다. 왕실이 뒤를 받친 이 프로젝트에서 키우는 오디로 빚은 술은 사람들 입에 제법 오르내리기도 한다. 타이 관광청은 이 프로젝트를 낀 생태관광을 외치며 구호까지 내걸었다. “푸파약을 거닐고, 유기농 채소를 먹고, 향기로운 커피 맛을 보고, 산꼭대기에 오르자.” 관광객을 끌어보려고 부쩍 애는 쓰는데 현실은 시원찮아 보인다. 찾는 발길이 없다. 여긴 구호보다 길 손질이 먼저다. 별난 사연도 없이 이런 엉망진창 길을 따라 막다른 국경 골짜기까지 찾아올 관광객은 없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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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국경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반남리 팟타나에 자리 잡은 타이 공산당 기념관이자 추모관인 푸파약기념관.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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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한복판 제단에 모셔진 ‘지도자’

반남리 팟타나에 닿자마자 부랴부랴 마을 꼭대기에 자리 잡은 푸파약기념관부터 찾았다. 평일 대낮인데 문은 닫혔고 관리자도 없다. 마을 사람 몇을 붙들고 물었지만 모두들 고개만 젓는다. 이 기념관을 찾는 이가 아주 뜸하거나 아예 없다는 뜻이다. 이 문 저 문 만져보니 쪽문 하나가 열렸다. 한참 망설였다. 이게 방문을 허락한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했던 탓이다.

“흐르는 눈물의 자취를 지우고자/ 기꺼이 모든 것을 던지겠습니다/ 내게 한 번 더 삶이 주어진다면/ 당신을 섬기는 데 바치겠습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푸미삭의 시구가 심장을 때린다. 1965년 타이공산당에 뛰어든 뒤 이듬해 의문스레 살해당한 은 시인으로 역사가로 언어학자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2005년 12월 문을 연 이 공산당 기념관은 전시물이 따로 없다. 흔해빠진 총 한 자루, 군복 한 벌도 없고, 그저 타이공산당 역사니 지도니 헌시 같은 것들을 사진으로 뽑아 벽에 붙여 놓은 게 다다. 기념관이라고는 하지만 1965~1990년 사이 무장투쟁에서 전사한 동지들을 기리는 추모관에 가깝다. “해마다 12월1일(1942년 타이공산당 창당일)이 오면 옛 동지들이 푸파약기념관에 모여 지도자를 비롯해 전선에서 산화한 이들을 기린다.” 공산당 케엣1(난 북부지역) 전선을 달렸던 팜 세라오(68) 말이다. 그이가 말한 지도자는 기념관 한복판 제단에 모셔 놓은 인민해방군 사령관 파욤 쭐라논이다.

파욤은 육군 중령으로 1947년 타완 탐롱 나와스왓 정부를 몰아낸 쁠랙 피분 송크람 장군의 쿠데타에 동참했으나 정치적 이견으로 갈등을 겪다 2년 뒤인 1949년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육군참모학교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파욤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1957년 타이로 되돌아온 파욤은 고향 펫차분에서 하원의원으로 뽑혔다. 그러나 그해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로 쁠랙 정부를 뒤엎자 파욤은 타이공산당에 뛰어들어 인민해방군 사령관이 되었다. ‘사하이 뚜 캄딴’(뚜 캄딴 동지)으로 불린 그이는 무장투쟁 전선을 이끌다 1978년 지병 치료차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80년대 초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애초 타이공산당은 당원들조차 누가 진짜 지도자인지 모를 만큼 철저히 조직을 감춰 파욤의 죽음뿐 아니라 역할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해체 선언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듯이 아직도 타이공산당 역사는 속 시원히 드러난 게 없다.

“누가 뭐래도 우리 지도자는 판토 파욤(파욤 중령)이었다. 그이는 우리와 함께 전선을 달렸고 우리는 그이 명령을 따랐다.” 파욤을 따라 케엣4(난 북부)와 케엣5(난 남부) 전선을 오갔던 피탁 피사짠(58) 말이다. 1974년부터 4년 동안 밥하고 빨래하고 경호하고 비서 하면서 파욤 곁을 지켰던 피탁은 “심장과 말이 같았던 사람이고, 차별 없이 모두를 도왔다. 내가 지금도 공산주의자인 걸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준 지도자였다”고 한다. “전선 지도자는 사하이 뚜 캄딴이었다. 농담도 즐겼지만 아주 엄격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런 강인한 지도자와 함께 전선을 뛰었던 게 자랑스럽다.” 케엣4 전선을 뛰었던 아룬 세린(73) 말이다. “사하이 뚜 캄딴은 1978년 중국으로 가서도 직접 명령을 내렸다. 내가 통신 담당자로 모스를 통해 그이 명령을 전선에 옮겼다. 공산당 안에서 그런 명령을 내린 지도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케엣3(난 남부) 전선을 달렸던 사띠엔 짜이삥(55) 말이다. 알려졌듯이, 옛 전사들 말을 들어보면 파욤이 무장투쟁을 이끈 지도자였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러나 파욤의 정치적 역할은 중앙위원이었다는 사실 말고 드러난 게 없다. 다만 타이공산당 서기장을 캄딴으로 기록한 1976년 민주깜뿌치아(크메르 루즈) 정부의 문서를 놓고 보면 파욤이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즈음 타이공산당 내부는 타이사회당(SPT)과 복잡하게 얽혀 정치적으로 단일지도체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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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파약기념관 한복판에 세운 인민해방군 사령관 파욤 쭐라논 추모 제단.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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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싸웠다”

이쯤에서 수라윳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여긴 말 그대로 군인 집안이다. 수라윳 외할아버지는 육군 작전사령관을 지낸 프라야 시 싯티송크람이고, 아버지는 파욤이고, 자신은 육군총장과 합참의장을 거쳐 총리를 했고, 이제 그 아들 논이 군인의 길을 가면서 4대째 대물림하고 있다. 수라윳은 우리로 치면 육군사관학교쯤 되는 쭐라쫌끌라오왕립군사학교를 마친 1965년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북부 반공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로부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전선에서 적으로 싸우는, 영화적 상상력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벌어졌다. 이념을 쫓아 아비의 심장을 향해 총질함으로써 내 충성심을 확인시켜야 하는 이 경험은 가족적 비극일 뿐 아니라 사회적 결함의 모진 본보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역사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까닭이다.

“자식으로서 나를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적어도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싸웠다. 내게 아버지는 영웅이다. 아버지는 내가 훌륭한 군인, 좋은 시민이 되도록 가르쳤다.” 푸파약기념관을 나서 반남리 팟타나 마을로 내려오는 동안 수라윳이 했던 말이 질기게 따라붙는다. 아버지에 대해 말을 아껴온 수라윳 속내는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다만 훌륭한 군인, 좋은 시민은 사회와 역사가 판단할 몫이다. 그 아버지 파욤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반남리 팟타나에 땅거미가 드리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연도, 타이공산당 역사도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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