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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김현주의 일상 톡톡] 피해자 시각에서 성폭력 판단…성범죄 재판 남성중심 사고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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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법원이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성을 고려하라는 주문을 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최고법원인 대법원도 이같은 추세에 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됩니다.

법원 내에서는 아직도 남성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성범죄 관련 소송에서 구시대적인 판결이 간혹 나오곤 하는데요. 이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희롱 소송의 심리와 증거판단의 법리를 제시했다는 게 대법원의 자체적인 평가인 만큼, 향후 관련 소송에서도 이런 판결 정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법원은 재판과정에서도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나가야 합니다. 가끔 재판과정에서 피해자 이름이나 주소, 직업 등 신상이 노출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의 발언 등 판사나 변호사가 성폭력 문제에 대해 왜곡된 통념을 드러내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법원은 성희롱·성폭력 없는 건강한 법원문화 조성을 위한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성희롱·성폭력 대책 연구반'을 만들어 가동하고 있습니다. 전국 법원장회의에서도 미투 대책을 논의하는 등 양성평등 문화 정착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세계일보

대법원이 여학생 성희롱을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를 복직시키라고 판단한 2심 판결을 깨고 돌려보내면서, 성범죄 관련 소송의 판단 기준을 처음 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와 이에 연대하는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한다)' 운동의 물결이 거센 가운데, 대법원이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위드유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3일 대법원이 제시한 판단 기준은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법원의 성 관념부터 바로잡자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대법원은 성범죄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성인지(性認知) 감수성' 차원에서 사건을 심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성인지 감수성은 오랜 고정관념이나 남성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 올바른 성 관념을 갖추는 것을 뜻한다.

대법원은 판사들이 피해자들의 진술이 믿을 만한지를 따질 때 성범죄의 특수성, 특히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우려해 진술을 꺼리는 점이나 가해자 및 남성 중심의 사회문화 안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는 진술은 그 의도를 쉽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대법원은 설명했다.

피해자가 2차 피해가 생길까봐 가해자와의 관계를 끊지 않거나, 가해자의 범행이 공론화된 이후에야 피해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는 점도 유념하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이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위배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 같은 대법원의 지적은 판사들마저도 성문제가 얽힌 사건을 두고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판결을 할 수 있다고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향후 관련 재판의 지침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은 이런 판단 기준을 대학교수 A씨의 해임처분 취소소송에 적용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을 성희롱했다는 사유로 해임된 전직 대학교수가 해임을 취소해달라면서 낸 소송이다. 1심은 징계사유가 사실로 인정돼 해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으나, 2심은 피해자인 제자들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해임 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2부는 전날 2심 판결을 깨고 재판을 다시 하라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2심 법원의 판단을 문제 삼았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취지였다. 대법원이 법리적 오류를 지적하기에 앞서 사건을 바라보는 2심 법원의 시각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대법원이 2심의 시각을 지적한 것은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한 점 때문이다. 2심은 피해자가 성희롱 등을 당한 뒤에도 A 교수의 수업을 듣고 좋은 강의평가를 줬던 점,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 뒤에 피해 사실을 드러낸 점 등에 비춰 실제로 피해자가 진술한 내용대로의 피해를 봤는지 믿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이 성범죄 사건의 특수성을 충분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단정했다고 판단했다. 성범죄 피해자이지만 여성이자 학생의 신분으로서, 상당한 권한을 지닌 교수의 수업을 무작정 수강하지 않고 나쁜 평가를 준다거나 사건 발생 직후 피해 사실을 고발할 처지가 됐는지를 깊이 살펴보지 않았다는 지적으로 해석된다.

일반 형사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이 믿을만한지를 따지는 것처럼 성범죄 관련 사건을 다루면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를 고려하지 않은 듯한 2심 재판부 시각을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성희롱 소송의 심리와 증거판단의 법리를 제시한 최초의 판결"이라며 "어떤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를 따질 때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심리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성범죄 사건 다루는 법원의 성 관념부터 바로잡아야"

대법원이 여학생 성희롱을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의 해임을 취소하라고 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낸 데 대해 여성단체들은 "성희롱에 대한 전향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한 것"이라면서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13일 논평을 통해 "(이번 판결은) 성희롱에 대한 전향적인 기준과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며 "이번 대법원 판결이 성희롱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성폭력 범죄 판결에 있어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해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 보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면서 "이런 대법원의 변화가 성폭력 근절을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자 뿌리 깊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미투 운동에 대한 응답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시민단체 연대체인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도 이날 낸 입장에서 "(이번 판결은) 성평등 실현을 위해 성인지적 감수성에 기반해 성희롱 사건의 심리와 판단을 해야 하는 법리를 최초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모든 재판부가 성인지적 감수성을 가지고, 성폭력 사건을 심리하고 판단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성폭력 2차 가해 문제 해결하려면 '피해자다움 강요하는 문화'부터 개선해야

성폭력 2차 가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문화'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적 해석'을 개선해야 한지는 지적이 제기됐다.

경찰청과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는 지난 11일 오전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관에서 '미투, 분노를 넘어 실천으로' 세미나를 열고 성폭력 피해자가 사회와 사법당국에서 입는 '2차 가해'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성폭력 2차 피해 예방과 근절'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맡은 배복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은 "피해자에게 '피해자 다울 것’을 강요하는 인권의식이 문제"라며 "결국 피해자들은 피해를 입고도 이를 증언하지 못하는 상처를 입는다"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당당하면 '꽂뱀'으로 몰리거나, 수사기관의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라'는 등 피해자가 직접 피해를 증명하도록 하는 사회적·제도적 한계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축시킨다는 설명이다.

배 위원은 특히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고도 피해자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2차 피해를 입게 되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피해자는 최초 신고에서 재판과정까지 피해 경험을 기억해야 하고, 반복적으로 진술해야 하는 고통을 당한다"며 "진술 내용이 수사기관이나 재판부 경험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으면 쉽게 의심받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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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한 법적 해석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의 국내 이행방안 모색'이라는 주제의 발표를 맡은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현행 형법은 강간죄 성립요건으로 '폭력 혹은 위협이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여성폭력철폐선언의 권고에 따라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를 강간죄의 요건으로 해석해야 한다" 제안했다.

특히 이 소장은 2013년에서야 '부부강간'을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을 들면서 "이 판결마저도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요건으로 삼고 있다"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동의 부족'에 기반한 판단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성희롱 피해자 보복성 인사' 르노삼성, 피해자에게 4000만원 배상하라

이런 가운데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와 피해자를 도운 동료 직원에게 불리한 인사 조처를 한 르노삼성자동차가 당사자들에게 수천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단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12부는 지난 20일 르노삼성자동차 직원 박모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사측이 총 4000만원을 박씨에게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보복성 인사는 불법 행위라고 회사 책임을 강조하면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낸 데 따른 판결이다.

이에 따라 원심이 사측의 배상액을 1000만원만 인정한 것과 달리 이번 판결에서는 배상액이 3000만원 더 늘어난 4000만원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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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사측은 근로자인 원고가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며 신속하고 적절한 구제조치를 해줄 것을 요청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원고에게 근거 없는 혐의를 씌워 징계처분 등 불리한 조치를 했다"고 지적했다.

사측이 성희롱 피해자 등에게 부당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남녀고용평등법 14조를 위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의 행위로 인해 원고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상당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런 점을 고려해 위자료 액수를 산정한다"고 말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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