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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왜 다시 6자회담이 주목 받는가?···6자 회담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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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115]
강대국들 사이 치열한 수싸움의 결과
한반도 둘러싼 각국의 속내 알 수 있어

美-北 양자대화는 미국이 부담스러워
美-北-中 3자 대화는 '中만 이득' 불만
中은 日 뺀, 日은 러 뺀 5자대화 제안

美·日 vs 中·러 구도에 한국 중재자로
절묘한 균형 이루며 '6자회담' 탄생

매일경제

2006년 12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6자회담 수석대표들. /사진=미국 국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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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 '6자회담'이 다시금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지난 5일 북한과 중국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방중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6자회담 복귀 의사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5월 예정된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이 이런 의사를 표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에 2008년 12월 수석대표회의를 끝으로 10년째 열리지 않고 있는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에 이목이 쏠린다. 일본은 최근 북한을 중심으로 한 외교전에서 소외되자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입지 강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도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 조건으로 6자회담 복귀를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6자회담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됐으며, 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해 최종적으로 정착된 구도였던 것일까. 북한 관련 회담들을 정리해 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판도와 이해관계가 잘 드러난다. 보다 적은 참가자로 이뤄진 회담에 들어간 국가일수록 더 강하고 영향력이 크며 깊은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다.

1994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감행한 이래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대화가 다양한 형태로 제안됐다. 그중 처음 실행된 게 1994년 북한과 미국 양자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제네바협상'이었다. 당시 영변 핵시설을 선제폭격하는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었던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였지만, 제네바협상에서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제네바 합의'에 도달했다.

이는 북한이 한국과 중국을 배제한 채 체제 보장의 최대 걸림돌인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지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로, 북한은 이 형태의 협상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 협상을 통해 단독으로는 북한에 사용할 지렛대가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2001년 북한이 제네바 합의에서 금지하기로 약속한 흑연감속로를 가동하며 계약을 파기하자 다시는 양자 대화에 임하지 않고 있다.

2003년 4월에는 미국과 북한이 협상을 벌이고 중국이 그 사이에서 대화를 중재하는 '3자회담'이 실현됐다. 중국이 북한 관련 대화의 '의장국'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화를 해본 미국과 북한은 고개를 저었다. 미국과 북한이 대립하는 구도 속에서 중국만 잇속을 챙기기 너무 좋은 대화라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북한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CVID)를 요구했으나, 북한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하며 대화를 결렬시켰다. 미국은 이 대화 후 앞으로 중국이 다리만 놓는 양자회담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북한 역시 중국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데 대해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은 자신이 의장국으로 주선한 3자회담이 별 성과 없이 끝나자 회담을 재구성해야만 했다.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대화에 참여시키길 원했고, 북한도 중국의 영향력을 부담스러워 했기에 더 많은 국가를 참여시키면서도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 과제였다. 중국의 수정안은 여기에 한국을 참가시켜 4자회담을 만들거나 한 국가를 더 추가한다면 일본이 아닌 러시아를 참가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중국은 가장 강력한 지역 라이벌인 일본을 이해관계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역시 5자회담 틀을 들고 나왔다. 기존 3자회담 당사국에 이어 한국과 일본이 대화국으로 참여하는 안이었다. 6자회담의 틀에서 보자면 일본까지는 들어가되 러시아는 빼는 안으로 볼 수 있다. 한·미·일 3국을 모두 넣어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중국의 우방이 될 수 있는 러시아는 배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편 당시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은 '10자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에 한국 북한 일본 호주 유럽연합(EU)을 합친 안이다. 그러나 참가국이 너무 많다는 문제점이 지적돼 결국 거리가 멀고 이해관계도 적은 유럽과 호주가 제외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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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좌석배치도. 한·미·일 대 북·중·러가 모여앉는 구도다.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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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종적으로 정착된 6자회담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가 모두 적절히 반영된 대화 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을 중심에 놓고 미국과 중국이 대치하는 가운데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미국과 중국 편에서 지원하고, 한국이 등거리 외교를 표방하며 중재자 지위를 확보해 절묘한 세력 균형이 이뤄졌다.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처음 열렸으며 이후 2008년 12월까지 총 6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2005년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로 복귀한다는 '9·19 공동선언' 등을 이끌어내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한 뒤인 2009년 7월 "6자회담은 영원히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한 뒤 무기한 휴업 상태에 들어간 상태다.

[안정훈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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