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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회색 건물이 품은 ‘공중정원’ 도심 속 오아시스로 대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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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휴식

세계일보

사막화되어 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바빌론의 공중정원처럼 틈을 통해 들어가고 틈을 이용해 정원을 경험하도록 설계한 ‘아미티스 가든’. 김용관 제공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과로를 피하는 것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을 지내며 몸의 여러 부분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 단골 한의원에 갔다. 평소에 늘 말이 없고 필요한 말만 툭 던지던 한의사는 나를 보며 아주 간명하게 진단을 내려주었다. “과로예요.” 그리고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는지 한 마디 더 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과로를 피하는 일이에요.”

휴식은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쉬는 상태를 이른다. 그런데 그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어느 날 성공한 기업가라 늘 여유가 있어 보이던 건축주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에게 매일매일이 힘들다며, 매일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매일매일 새로운 어려움이 닥치고, 매일매일 예상치 못한 괴로움이 불쑥 찾아온다.

쉬지 못하는, 힘들고 피곤한 삶이 이어지는 것은 모든 것이 늘 변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세상을 사는 지혜란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에 관한 것일 것이다. 변화를 인정하고,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각자 시대를 이해하고 스스로 변화하고 혁신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변화를 보는 일, 겪는 일에는 상당한 두려움이 따르고, 힘들거나 괴로울 때도 많이 있다. 사회의 갈등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런 변화를 수용하는 인식과 자세의 차이이다. 헤어스타일이 변하고 옷을 입는 모양이 달라지고 기호품이 바뀌고, 나아가 결혼관이 바뀌고 심지어 가족의 형태도 많이 변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나 공간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내가 살았던 혹은 내가 자랐던 공간이 변하는 것은 조금은 괴롭고 쓸쓸해지는 일이다. 간혹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장소인데 오랜만에 갔다가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무척 당황하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이 발전일 수도 있고 개선일 수도 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요즘은 전국의 방방곡곡을 파헤치고 논과 밭을 갈아엎고 아파트를 세우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중 서울은 특히 변화가 심한 곳이다.

‘홍대앞’은 홍익대학교 앞이라는 일반명사에서 젊음이 드글드글 끓어 넘치는 곳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마포구 어떤 구역을 이르는 고유명사가 된 곳이다. 그리고 그 영역은 점점 넓어진다. 상수동과 서교동 언저리에서 이제는 동교동, 합정동, 망원동, 연남동까지, 마치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하듯 ‘홍대앞’은 점점 넓어진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그냥 사람 사는 집들과 생필품을 파는 가게들만 있던 동네가 전혀 다른 동네로 바뀌어버렸다. 카페와 술집과 패션숍과 갤러리가 그득한 거리를 젊은이들이 보폭을 좁히고 양떼처럼 무리지어서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몰려다닌다.

한번은 홍대앞에 있는 귀청이 찢어질듯 음악이 나오는 클럽에 간 적이 있었다. 플로어에서는 아까 지하철 역 계단을 가득 메우던, 잔뜩 뭉쳐놓아 뚱뚱해진 실뭉치처럼 한데 모여 느린 속도로 굼실굼실 함께 움직이던 젊은이들이 춤을 추는 것인지 사람들에게 밀려 움직이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희미한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춤을 추는 젊은이들의 표정이었다. 그곳에 놀러왔음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무척 심각하고 사념적인 표정이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몸을 흔드는 것일까. 예전에 우리의 윗세대가 우리를 보면서 했던 생각을 나는 그들의 머리꼭지가 보이는 2층에서 내려다보며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진정 휴식이 필요해 보였고 마음의 평화가 필요해 보였다.

세계일보

‘아미티스 가든’ 정면투상도


# 위로와 휴식이 필요한 시대

어느 시대건 편안한 시절은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시간 동안, 늘 변화와 충격과 결핍이 혼합된 아주 이상한 공기를 맡으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정치적으로도 훨씬 민주화가 된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무척 힘들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고 고민할 필요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너무 많은 선택지들이 놓여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없나 보다. 그뿐 아니다. 너무나 많은 공부와 너무나 많은 정보에 일찌감치 세상에 대한 피로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젊음도 변한다. 나는 이제 기성세대가 된 지 한참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젊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건 내 몸과 마음이 세월의 속도를 미처 쫓아가지 못해 생긴 착각일 것이다.

나는 어떤 해 일 년 동안 사철나무숲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일 년 내내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만들어놓은, 우산 속처럼 둥그런 내부를 가지고 있는 숲이었다. 지금은 그곳을 떠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읽을 때마다 그 숲이 생각나는 시가 있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이라는 시인데, 소설가이며 시인인 장정일의 첫 번째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열면 두 번째로 나온다. 그리고 내가 피곤할 때마다 장영수의 ‘수위실지기’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시이다.

시가 내 뻐근한 등줄기를 토닥토닥 두드려줄 리 없고 석고처럼 단단하게 뭉친 내 어깨를 주물러줄 리 없지만, 시는 내게 위로를 준다. 말의 힘인지 경험의 힘인지 인식의 힘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글들이 간혹 있다. 생각을 정리하게 해준다거나 괜찮다고 직접 위로를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시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 구깃구깃 구겨져 있던 나의 자존감이라든가 자부심이라든가 열망 같은 것들에 대고 ‘호’ 하며 입김을 불어주는 것 같다.

장정일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살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시비들에 무력해지고, 내가 겪지도 듣지도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엽기적이고 저급한 소식들을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고, 그 소식의 아래로 주르륵 달리는 익명의 힘을 빌려 함부로 뱉어내는 무서운 댓글들을 만나고, 그런 일들이 마치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소음처럼 자꾸만 신경을 거스른다. 그렇게 편리와 속도로 위장하고 우리를 속이는 현실이라는 사막에서 시달리다 보면, 우리에겐 잠시 쉴 수 있는 오아시스가 간절해진다.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장정일의 시는 시편 137편에 나오는 글을 변용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바빌론 강가에 앉아 눈물 흘린 사람들은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유대인들이다.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바빌로니아로 끌고 왔다. 그 사건은 ‘바빌론의 유수’라고 기록되었고, 그때의 이야기가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정원에서 잠시 휴식하며 뒤를 돌아보다

그 무서운 느부갓네살은 바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이며, 바빌로니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아미티스는 메디아의 공주였다.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은 아미티스를 위해 만든 정원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초목이 무성한 메디아에서 척박한 바빌로니아로 시집와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향수병에 걸린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강물을 끌어들여 공중에 정원을 조성했다.

공중정원이라는 말은 그 역사적 의미를 떠나 아주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내게는 사막에 물을 길어 올려 정원을 가꿀 정도로 깊었던 왕비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로맨틱한 이미지보다는,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암석이 연상되었다. 예를 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중에 나오는 것 같은, 뿌리가 드러난 채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장면 혹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뜨의 피레네의 성이 연상된다.

홍대 근처 반듯반듯하고 마당이 넓은 집들이 모여 있던 동네가, 커피 마시고 파스타 먹고 옷 사입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바뀌는 그런 곳 한가운데 넓은 정원이 있었던 땅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 건물을 새로 짓는 설계 진행 중에 건축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각 층에 발코니를 내고, 옥상을 활용해서 입체적인 정원을 만들자고 제안하며 아미티스의 공중정원을 떠올렸다.

공중정원은 건물의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건물 이름에도 붙이기로 했다. 나는 팍팍한 바위의 틈으로 녹색의 풀들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는 그런 그림을 연상했는데, 건축주는 그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혹은 지나친 상업주의에 물들어 사막화되어 가고 있는 홍대앞이라는 동네에 한숨 돌릴 공간이 되는 오아시스를 연상했을 수도 있다.

먼저 법적규제나 덩어리의 분절로 생긴 틈을 이용해서 다양한 꽃밭을 만들었다. 각 층에 테라스와 발코니를 만들고, 주차리프트 상부에 정원을 만들었으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주변을 파서 만든 선큰가든에는 높이가 5m 가까이 되는 우람한 단풍나무를 심어놓았다.

말하자면 이 건물의 개념은 ‘틈’이다. 틈은 벌어져서 사이가 난 자리를 뜻하기도 하고,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뜻하기도 한다.

길에서 건물을 정면으로 보면 다양한 틈이 있는데, 그 틈으로 들어가면 1층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중정으로 가기도 하고 후정으로 가기도 하며, 2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나기도 한다. 건물 맞은편에는 원룸, 옥탑방등 서로 마주보기 불편한 집들이 잔뜩 있어서, 전면으로 커다란 가벽을 설치하여 적당히 시선을 걸러내고 가벽과 건물 외벽 사이에 1m 정도 발코니를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가벽 중간중간 틈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일조권제한으로 뒷집과의 사이에 1.5m 이상 생긴 틈 덕분에 생긴 후정은 예전에 학교 뒷마당처럼 만들었다. 마사토가 깔린 좁고 긴 그 뒷마당은 한적하고 무척 여유로웠고 숨어 있기 좋은 공간이었는데, 이곳도 도로에서 한 겹 더 들어와 홍대 앞의 복잡함과 소음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다. 담장은 시멘트 벽돌을 마구리면으로 보이도록 통줄눈으로 쌓고 그 앞에 꽃밭을 만들고 자작나무를 나라비 심어놓았다.

정면으로 난 틈은 건물로 들어가는 4개의 문이 된다. 지하 1층에서부터 3층까지 각각 도로에서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그 길은 넓기도 하고, 좁고 어둡기도 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대나무와 담을 끼고 빙 돌아가기도 한다. 어디로 들어가건 들어가다 보면 처음에 내가 들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간격이 줄어들고 모두 통제가 가능해진 아주 피곤한 체계 속에 던져져있다. 특히 도시는 더욱 그렇다. 마르고 건조한 사막이면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곳에서 틈을 통해 들어가고 틈을 이용해 정원을 경험하며, 도시라는 사막에서 문득 나타나는 오아시스를 만나듯 잠시 쉬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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