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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때론 버거운 이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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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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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마더>라는 드라마가 끝났다. 마지막 회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펑펑 울었다. 이처럼 ‘엄마’라는 주제는 항상 사람의 가장 깊숙한 샘을 터뜨린다. 이 드라마에는 여러 종류의 모성애가 등장하는데 꼭 자기가 낳은 아이가 아니더라도 모녀가 될 수 있음에 공감이 갔다.

어떻게 교사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갈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에 있다 보면 가끔 교사와 엄마의 중간쯤 되는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엄마의 부재나, 혹은 반대로 엄마의 존재로 문제가 되는 아이들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불쌍해서 내가 입양하고 싶은 아이도 있었고,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한 아이에게는 “내가 엄마 역할을 대신 해줄게.” 라고 말해 버린 적도 있었다. 내 앞에서 자살해 버리겠다고 해서다. 그렇게 말한 책임을 지느라고 1년 내내 고생했지만, 그 학생으로부터 다시는 자살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 중에는 엄마와의 애착관계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곧잘 엄마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엄마와 분리되는 것에 대해 극도의 절망감을 느낀다. 때론 친엄마에게 학대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한 여학생은 얼굴에 자주 멍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때린 것이다. 그 학생의 말로는 엄마가 어렸을 때 공부 잘하는 오빠만 좋아하고 자기를 무시해서 엄마가 외할머니를 지금도 안 만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정작 그 엄마가 공부 못하는 자기보다 공부 잘하는 오빠를 더 사랑해서 속상했다. 그러나 엄마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래서 삼촌들이 엄마를 아동 폭력으로 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말렸다고 한다. ‘마더’에 나오는 아이 같았다. 그 학생의 엄마는 자기가 어릴 때 겪은 일을 딸에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강남병원의 강 봉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아이 때문에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종종 엄마는 아이의 모습 속에서 그 토록 싫어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학벌에 대한 열등감으로 힘들어 했던 엄마는 아이가 성적이 떨어지면 불안해하고 아이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즉 과거 열등감으로 힘들어 했던 자신의 모습을 아이에게 투사하고 동일시함으로서 더 분노하고 힘들어 한다. 엄마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치다 싶을 땐 감정을 추스르고, 아이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이 안 될 때는 전문가의 도움으로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불안정하고 잘못된 결합 관계(bonding)가 해결이 안 되면 아이는 겉만 어른일 뿐 정서적으로는 미숙한 성인아이가 되어 자존감이 낮고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눈치만 살피는 불행한 삶을 살 수 있다.”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는 아이의 특성상 엄마의 불행이 곧 아이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친자식을 살해했다는 패륜적인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예전에는 이런 뉴스를 본 기억이 없다. 고전 동화 중에서도 ‘신데렐라’나 ‘백설 공주’ 등 계모가 아이들을 학대하는 동화가 많았지, 친엄마가 학대하는 이야기인 ‘홍당무’는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릴 때 할머니나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하던 말이 있다. “아유~내 새끼~~”하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에는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모성애가 담뿍 느껴진다. 그런데 요즘은 자식을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 같다. 그냥 내 새끼라서 무조건 사랑스럽고 책임감을 느끼는 원초적인 모성애가 점점 사라져가는 걸까?

모성애를 당연시하던 이전 시대에 비해서는 확실히 모성애가 결핍된 엄마들이 눈에 띈다. 가까운 직장여성들과 대화하다보면 자신에게는 모성애가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특히 시어머님이 같이 살면서 아이를 길러주시는 경우,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끈끈하지 못하다는 말을 한다. 하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들어가는 여자들에게 진한 모성애까지 바란다면 무리일 것이다. 모성애는 타고난다기보다 만들어지는 것 같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도 함께 자라는 것이다.

힘겹게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이 더해지면 순수한 모성애가 변질되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를 사회에 번듯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첫 아이가 걷는 게 늦어 맘고생을 하던 때였다. 공원에 앉아있는데 두 돌은 되어 보이는 아기가 엄마에게 “어머, 어버버~~”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운 증후군 아이 같았는데 그런 소릴 처음 냈나보다. 엄마는 연신 “아유~~ 우리 아가가 엄마라고 했네.” 하면서 기쁨의 눈물과 함께 아이를 꼭 안는다.

내가 듣기에는 엄마라고 한 게 아니라 신음소리 같았는데 말이다. 그리고는 자기 아이가 너무 예쁘다는 듯이 연신 쳐다본다. 그 엄마는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특징적인 외모를 가진 그 아이에게 공주 풍 드레스를 입히고 모델처럼 꾸며놓았다. 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합친 것 보다 아름다웠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엄마임을 버거워하는 이유가 혹시, 아이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키우려고 하는 스트레스 때문은 아닐까? 엄마들이 아이한테 화를 내는 이유 중 대부분이 공부와 관련된 것이거나 생활습관 등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에 관련된 것들이다. 아이가 마음속으로 행복하지 않을 때가 더 문제인데 말이다. 아이 때문에 화를 내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한테 화를 내는 것일 수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먼저 안아주자. 그래서 엄마부터 행복해지자. ‘엄마’라는 이름이 더 이상 버겁지 않은, 위대하고 따뜻한 것이 되려면 말이다.

[허윤숙 작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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