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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38명 과학자 중 유일하게 '이름이 없던' 흑인 여성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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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전 찍힌 사진 한 장이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주목을 받았다. 1971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열린 고래 생물학 국제 학술대회 당시 찍힌 사진이다. 사진 속 과학자 38명은 거의 남성이고, 그 중 대부분은 백인이다. 단 한 명, 얼굴이 반쯤 가려진 젊은 흑인 여성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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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사진을 발견한 사람은 일러스트레이터 캔디스 앤더슨이었다. 범고래 포획을 다룬 그림책을 내기 위해 자료를 뒤지던 중, 책에 꽂힌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 남성 일색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 과학자의 존재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사진 설명 어디에도 여성의 이름은 없었다. ‘신원불명(unidentified)’이라는 설명밖엔. 나머지 남성 과학자 37명은 모두 실명이 적혀 있었다.

앤더슨은 이 ‘신원불명’의 여성을 찾기로 했다. 그는 1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호기심이 계속 신경을 긁었다. 여성이 누구인지, 학회에서는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열흘 앞선 지난 9일 자신의 트위터에 사진을 올려 도움을 청했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전세계 ‘트위터 탐정’들로부터 수 백 건의 제보가 쏟아졌다. 미 해양포유류위원회 연구원 디 앨런도 트위터에서 사진을 보고 자신의 정보망을 가동했다. 당시 학회에 참가했을 법한 과학계 여성 원로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마침내 여성과 일한 적이 있다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큐레이터와 연락이 닿았다. 사진의 주인공은 당시 박물관 포유류 부서에서 일하던 기술직 직원 실라 마이너 허프(7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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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는 미 내무부 고위공무원 출신의 잔뼈 굵은 동물 전문가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 내무부 어류·야생동물관리국에 지원했지만, 연구직 대신 속기사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허프는 ‘당신 비서가 되기엔 학교를 너무 오래 다녔다’며 거절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후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35년간 여러 연방정부 산하기관을 돌며 각종 환경 정책 수립에 관여했다. 그는 한국의 4급 서기관에 해당하는 내무부 GS-14급 관료로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최근에는 다섯 손주의 할머니로, 은퇴 후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벨리댄스와 오픈카 운전을 즐길 만큼 열정적인 성격을 지녔다. 허프는 페이스북을 통해 앤더슨의 연락을 받은 뒤에야, 자신을 둘러싼 소동을 알게 됐다고 했다고 21일 CNN에 말했다. 앤더슨은 허프의 이야기를 비롯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거나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한 여성들의 역사를 책으로 쓸 예정이다.

허프는 1971년 사진에서 자신의 이름만 지워진 것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아름다운 지구에 보탬이 될만한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아는게 뭐가 중요하겠나.”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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