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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서울 시내 한복판서 '모세의 기적'...확 달라진 '소방차 길터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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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길 터주기 훈련 중입니다. 도로 좌·우측으로 양보합시다.”
눈발이 날리던 지난 21일 오후 2시 58분. 서울 창덕궁 삼거리→안국역 교차로 방향에서 소방차 스피커가 ‘웅웅’ 울렸다. 꽉 막힌 3차선 위의 차량들이 좌우로 꿈틀대더니 이윽고 가운데가 열렸다. 소방차 조수석에 앉은 기자의 눈에는 ‘모세의 기적’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20년 경력의 베테랑 조응연(47) 소방위는 더 놀란 눈치였다. “어라? 열리네?”

민방위 날을 맞은 이 날 전국 316곳 소방서에서 길 터주기 훈련이 실시됐다. 기자가 동행한 훈련 코스는 ‘①세종대로 사거리→②서대문역 사거리(P턴)→ ③종로1가 사거리→④종로4가 사거리→⑤동묘 앞 사거리→ ⑥흥인지문 사거리→⑦이화사거리→⑧경복궁 사거리’까지 약 12km 구간. 소방차·순찰차 등 15대가 이번 훈련에 참가했다.

평소 이 길은 ‘마(魔)의 구간’으로 유명하다. 서울 시내에서도 가장 정체가 극심한 곳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날은 오전부터 내린 눈이 도로 위로 점차 쌓이고 있었다. 출발 전부터 ‘길 터주기가 제대로 될까’하는 우려가 나왔다.

종로서는 이번 훈련에서 한 가지 실험을 하기로 했다. 소방차와 택시가 동시에 출발한 뒤 도착시각을 재어보기로 한 것. 출발 시각인 오후 2시 33분, 소방차와 택시가 나란히 종로소방서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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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에 탑승한 기자는 별다른 갑갑증을 느끼지 못했다. 평균 시속이 26km 정도 나왔다. 시원하게 뚫린다고 할 수 없는 속도지만, 그렇다고 브레이크를 밟고 한참 기다리는 순간도 없었다. 소방차 안내방송을 들은 운전자들이 양옆으로 길을 터 준 까닭이다.

중간쯤인 종로 5가에서 강성현 소방관이 말했다. “작년에는 여기까지 오는데 30분이나 걸렸어요. 그런데 오늘은….이상하네.” 차량에 탑승한 또 다른 소방관이 맞장구쳤다. “북촌 한옥마을, 광장시장이 밀집된 익선동 주변으로 출동 지시가 내려오면 (도로 정체로) 현장에 빨리 도착하지 못 할까 봐 겁부터 났는데, 지금은 아주 시원하게 열리네요.”

목적지인 경복궁 사거리에는 오후 4시 5분에 도착했다. 총 걸린 시간은 28분으로 측정됐다. 함께 출발한 ‘택시조(組)’은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택시는 시내 한가운데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차선 변경도 쉽지 않았다. ‘깜빡이’를 넣으면 오히려 옆 차선에서 간격을 좁혀 들어왔다. 평균 시속은 13km 정도쯤 나왔다. 택시가 목적지에 들어온 것은 4시 37분. 1시간 4분이 걸렸다. 소방차와 비교해서는 36분이 더 걸렸다.

“한 달 간격으로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밀양 요양병원 화재로 발생한 사상자(死傷者)만 228명입니다. 대형참사가 올겨울에 연달아 터지면서 국민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 이런 참사가 정말 남의 일이 아니구나. 우리 동네에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구나. 이런 생각들이 소방차 길 터주기에 변화를 가져온 게 아닐까요.” 박근종 종로소방서장 얘기다.

소방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겨울철(12월~이듬해 1월)에 발생한 화재로 사망한 사람은 76명→65명→111명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부상자도 320명→311명→452명으로 급증했다. 연이은 대형 화재 참사가 실제 빈도와 관계없이 국민적 공포감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터넷 등으로 참사를 생생하게 접하면서 대중에게 '화재가 남의 일이 아니구나'하는 인식이 생기고 있다”며 “시민의식이 점차 성숙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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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안국역 교차로에 소방차가 진입하자 차량들이 도로 2차로를 비워주고 있다. 서울 종로소방서는 이날 오후 종로구청, 종로경찰서, 혜화경찰서와 합동으로 종로구 도심 일대에서 ‘소방차 길 터주기 훈련’을 진행했다./김유섭 기자


실제 제천·밀양 참사 이후 민관(民官)을 가리지 않고 화재원인에 대한 분석작업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 제천 화재 참사 때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불법 주·정차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당시 소방차가 화재 신고 7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불법 주차된 차량들을 피해 500m를 우회하는 바람에 14분이 더 걸렸다.
언론에서는 영국과 캐나다 등 서구권 국가에서는 소방차 출동 시 불법주차 차량을 밀어버린다는 내용이 소개됐고, 뒤따라서 “소방차 골목 통행 및 주차를 쉽게 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과태료가 크게 늘어난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지난해 12월 개정된 소방기본법은 소방차에 양보하지 않은 운전자에게 최대 200만원의 과태료를 물게 했다. 현행 20만원에서 10배나 인상된 것이다. 운전자 최준호(29)씨는 “소방차 길 터주기를 안 하면 과태료가 어마어마 하다는 뉴스를 봤다”며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지만, 올해부터는 아무래도 ‘소방차 있으면 일단 비키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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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1일 대형 화재가 발생한 충북 제천시 하소동 피트니스센터에서 소방관들이 잔불 정리와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 /조선DB


길 터주기 훈련이 다 잘 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일부 차량들은 “길을 열어달라”는 소방차 방송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방차가 자기 앞으로 진입하자 경적을 울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운전자들도 일부 있었다.

불법 주·정차 문제도 완전히 개선됐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날 서울 종로구 청계상가 부근 이면도로에는 10여 대의 차가 여전히 불법 정차돼 있었다. 200m 남짓한 이 구간을 빠져나가는 데만 5분이 걸렸다. 실제 상황이 벌어졌을 때 5분은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가르는 귀중한 시간이라는 게 소방관들의 이야기다.

박근종 종로소방서장은 “이번 훈련의 주 코스였던 대로(大路)에서는 소방차 길 터주기가 개선되고 있지만 협로(狹路)나 이면도로에서는 여전히 소방차가 주행하는 데 여전히 장애가 많다”고 했다.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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