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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죽어도 돌아오지 말라”…4·3으로 제주 떠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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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살기 위해 떠나야 제주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

4·3 광풍 피해 일본으로, 육지로 떠난 ‘디아스포라’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평생 고향 그리며 살아


한겨레

김이선씨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58년 만에 북에 있는 오빠를 만난 것을 기념해 제주시 조천읍 신안동의 부모 묘소 앞에 세운 ‘남매상봉기념비’를 김씨의 아들 박영선씨가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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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많은 제주사람은 일본으로, 육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주섬이 지긋지긋해서 떠났고, 독자나 종손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나 할머니 손에 이끌려 ‘죽음의 섬’을 벗어났다. 군·경 토벌작전이 강화되면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살리기 위해’ 밀항선에 태워 보냈다.

‘4·3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시작됐다. 거센 바다를 건너는 제주사람들은 목숨을 내놓고 배에 올랐다. 낯선 땅에서 삶은 힘들었지만, 죽음은 피할 수 있었다. 제주와 일본, 미국 등으로 흩어져 살거나 북으로 간 형제자매들도 있다. 이들은 고향에 있는 부모의 부음 소식에도 안타까워 했을 뿐 돌아오지 못했다.

■ 일본으로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몰려 있는 오사카 이쿠노에서는 제주도에서 초토화가 한창이던 1949년 1월3일 재오사카 제주도 대정면 친목회가 ‘인민학살반대추도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마을별 추도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일본으로의 밀항 경로는 제주에서 직접 가거나 부산과 쓰시마를 거쳐 야마구치현과 기타큐슈 사이 뱃길을 많이 이용했다. 1948년 10월 하순께부터 해상경비가 강화되면서 밀항선들은 미나미큐슈 쪽으로 경로를 바꿨다. 특히 초토화 시기와 맞물리면서 밀항자들이 급증했다. 당시 일본에 주둔한 영연방점령군의 1948년 10월25일치 ‘에히메현을 통한 불법입국 통제’ 보고서에는 “10월 들어 날마다 한국의 밀항자들이 붙잡혔고, 300여명에 이르렀다”고 돼 있다. 이 시기 제주에서 일본 에히메현으로 밀항하다 붙잡힌 제주도민은 5차례에 걸쳐 289명이나 됐다. 그러나 4·3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없다. 4·3이 끝나갈 무렵 당시 김용하 제주지사는 “4만여명이 일본으로 갔다”고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다. 5천~1만여명이 일본을 건너갔다는 연구자들도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뒤 고향인 서귀포시 대정읍에 정착했던 이창순(86?도쿄)씨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48년 친구 3명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지난 1월14일 도쿄에서 만난 이씨는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나오라고 했다. 안 나오면 ‘너도 빨갱이다. 총살하겠다’고 해서 모두 나갔다.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제주를 떠나 서울에 잠시 머물다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씨는 “할머니가 1949년에 돌아가셨는데, 나한테 죽어도 제주도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다. 종손인데도 할머니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 한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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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일본 도쿄에서 만난 제주 출신 재일동포 2세인 원일동씨가 아버지와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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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우에노에서 만난 재일동포 2세 원일동(59)씨가 건넨 명함에는 이름이 ‘진일동’으로 돼 있었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출신인 원씨의 아버지(원경연·작고)도 4·3 때 살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제주농업학교 재학시절 학생활동을 하다 산으로 피신했던 아버지는 토벌대에 10여명과 함께 한라산 들판에서 총살되는 순간 총이 격발되지 않는 틈을 타 모래 구덩이로 떨어져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 뒤 고모 집에 숨었다가 경찰에 붙잡혀 몇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아버지는 밀항선을 탔다.

원씨는 “토벌대들이 왔을 때 아버지를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 할머니가 막아서서 도망시켰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는 잡혀서 엄청나게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됐다. 아버지가 3대 독자여서 아들을 살리려고 할머니가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제주에서 살 수 없었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쓰시마를 거쳐 하카다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오무라수용소로 보내졌다. 김녕리 출신 재일동포들은 아버지가 송환되면 처형될 것이라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일본돈 80만원을 모아 ‘진태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그때부터 그가 일본에서 불린 이름은 진태영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원씨는 진태영의 아들 ‘진일동’이 됐다. 원씨는 “아버지는 규슈에서 도쿄로 올라올 때 할머니 기일을 맞아 술과 주먹밥을 사고, 향을 피워 기차 안에서 제사를 지낼 정도로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원씨의 아버지는 아들한테 4·3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지만, 아버지는 일본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제주도를 찾지 않았다. 원씨는 “아버지가 몇 번이나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머리를 숙일 수 있느냐. 통일된 다음에 가겠다’며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40살이 넘어 제주에 처음 간 원씨는 “어릴 때부터 마을 친목회 활동도 하고 집에서는 제주말을 쓰면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4·3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한경익(84·도쿄)씨는 당시 1년 선배가 총살당하고, 그 선배의 아버지가 “외아들을 살려내라”며 지서 앞에 드러누워 울부짖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좀처럼 4·3 경험을 이야기 하지 않던 한씨는 “어떻게 동족을 개돼지처럼 죽일 수 있나. 4·3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씨는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아버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팡이를 짚고 나를 보내려고 정거장까지 나왔다. 그게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1월 일본 가와사키현에서 만난 방정옥(81)씨도 4·3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4·3이 발발하던 1948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방씨는 그해 5월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서 생활하다가 1951년 봄 제주로 들어왔다. 그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2년 후배의 어머니가 밭에서 죽을 때였어요. 서북청년들이 주민들한테 눈을 가린 그 어머니를 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민들이 주저주저하자 서청들은 주민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어머니한테 ‘용서해달라’며 죽창을 찔렀어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쉬쉬했어요. 너무나 끔찍해 몸서리쳤습니다.” 1965년 일본으로 건너간 방씨는 “어떻게 4·3을 잊어버릴 수 있느냐”면서도 말을 아꼈다.

■북으로 “행여 살아계실까 가슴 조이며 기다리던 인내의 세월, 수없이 흐르던 눈물, 부모님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지새우던 순간들이 권배 오빠를 만나 번창한 가족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니 봄눈 녹듯 사르르 사라집니다.”

제주시 조천읍 신안동의 한 가족묘지의 부부 묘 앞에는 독특한 표지석이 있다. 만 10년 전인 2008년 3월7일 김이선(86·제주시 조천읍)씨 등 자녀들이 세운 ‘남매상봉기념비’다. 김씨는 2007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가 오빠가 북에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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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지 58년 만인 2007년 5월12일 남북 이산가족상봉 행사 당시 만난 북의 작은 오빠 김권배씨와 김이선 김씨의 큰 언니 김일선씨(왼쪽부터). 김이선씨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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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 서로가 말도 못하기 때문에 갈 때부터 절대 울지 말자고 약속했어. 죽지 않고 살아서 보기만 해도 좋은데 울긴 왜 울어. 저쪽에서 걸어오는데 오빠로구나 했어. 오빠도 ‘이선아’하면서 나를 불렀어.” 지난 2007년 5월12일 금강산에서 열린 제15차 이산가족 상봉 때 김씨는 북한에 사는 작은 오빠 김권배(90)씨를 만났다. 18살과 22살에 헤어진 남매는 58년 만에 만났지만 울지 않았다. 남매 상봉 6개월 전에 죽어가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한 옆 마을 출신(조천읍 신촌리) 올케가 북에 있는 제주도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씨의 아들 박영선(64)씨는 “우리까지만 족보를 5권을 만들어서 그 밑에다 우리 아이들과 큰이모님 아이들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제주도에 오면 먹고 살 게 있으니까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4·3 당시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사람들은 한국전쟁 시기 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처형되거나 행방불명된 경우가 많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북으로 간 경우도 있다. 김씨의 작은 오빠는 서울에서 삼촌 회사에 다니다 한국전쟁 시기 북으로 가게 됐다.

고향 조천에서 해방 뒤 야학 활동을 했던 작은 오빠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 이후 경찰의 주목을 받아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숨어 지냈다. 4·3이 본격화하고 작은 오빠를 찾아내라는 경찰의 닦달에 조천의 수용소에 수용됐던 아버지는 1949년 1월5일 조천지서 앞 밭에서 총살됐다. 15살이었던 김씨는 밤새 아버지에게 입힐 옷을 만들고 9살짜리 동생과 마차를 빌려 아버지의 주검을 실어다 인근 밭에 가매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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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선씨가 이산가족상봉 당시 패용한 이름표에 삐뚤삐뚤하게 쓴 ‘또 만나야지’라는 글에서 오누이의 애틋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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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수용소에 끌려갔던 어머니(김창환?당시 49)는 같은 달 22일 뒤따라 희생됐다. 제주시의 친척집에 숨어 지냈던 작은 오빠는 어느날 부모가 죽은 고향이 싫다며 서울로 떠났다. 김씨의 큰 오빠 김임배(당시 29)씨는 한국전쟁 직후 지서에서 회의가 있다며 데리러 와서 나간게 마지막이었다. 김씨의 언니 일선(94)씨는 “처음 제주경찰서로 넘어간 큰오빠가 6월에 죽었는데 경찰이 얘기를 하지 않아 그해 8월까지 사식을 사들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중에야 경찰이 큰 오빠를 배에 싣고 두어시간 나간 뒤 돌에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가 시집간 뒤여서 김이선씨는 16살 때부터 70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 제사를 치렀다.

“부모님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고,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남매상봉기념비를 세웠다. 오빠는 부모 죽은 게 너무 억울하니까 통일이 돼도 오지 않을거야.” 김씨의 말이다. 김씨 가족묘지에는 4·3 당시 희생된 부모와 큰 오빠의 비문이 4·3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육지로 지난달 23일 경기 고양시에서 만난 오추자(80?경기 고양시)씨는 국내 ‘4·3 디아스포라’ 사례다. 오씨의 가족은 1946년 가을 제주시 노형 외가집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서 목포를 거쳐 제주도로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남동생 두명 모두 왔다. 오씨는 “아버지가 얼마 있다가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며,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오씨의 아버지(오영수·당시 34)는 1947년 3·1사건 전날인 2월28일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러 제주에 왔다. 이튿날인 3월1일 느지막이 일어난 아버지 오씨는 아침 겸 점심을 먹다가 동네 반장이 “관덕정 광장에서 3·1절 행사를 한다.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듣고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 후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진 3·1사건은 4·3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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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추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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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는 “아버지가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우리한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며 “아버지가 죽으려고 왔는지 몰라도 딱 맞춰서 왔다. 정답게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버렸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달 유복자로 태어난 남동생은 4살이 되던 1950년 6월 숨졌다. 6살 아래 남동생도 그즈음 숨졌다. 오씨는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온 종일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살았다. 이를 보다 못한 외삼촌들이 우리를 부산으로 데려왔다. 어머니가 부산에서 힘들게 장사하다가 다시 서울로 거처를 옮긴지 올해로 66년이 됐다”고 말했다.

“3·1사건, 4·3사건으로 육지로 나오게 됐어요. 동네 삼촌들은 일본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아무런 일이 없을 텐데 고향에 돌아왔다가 이런 일이 생겼다면서 떠나라고 했어요.”

4·3으로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또다시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고, 그곳에서 뿌리를 박고 새로운 터전을 일궜다. 그리고 일본으로, 육지로, 북으로 떠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늘 ‘고향 제주’가 자리 잡고 있다. 4·3의 디아스포라는 현재진행형이다.

도쿄 제주 고양/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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