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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설왕설래] 꽃샘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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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중국 한나라 때 절세의 미녀 왕소군은 황제의 후궁이었다가 흉노와의 화친정책으로 흉노 왕의 아내가 된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중국의 대표적 애화(哀話)다.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는 ‘왕소군’이란 시에서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온 것 같지가 않네(春來不似春)”라고 노래했다. 춘래불사춘이란 말의 기원이다. 요즘 날씨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른 봄철에 일시적으로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지는 현상을 꽃샘 또는 꽃샘추위라고 한다. 풍신(風神) 혹은 바람할미가 꽃 피는 것을 시샘해 심통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철 내내 동장군 위세를 떨치던 시베리아 기단이 약화돼 기온이 오르다가 갑자기 기단이 강화되면서 생기는 이상 저온현상이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2월 바람에 김칫독이 깨진다’는 속담도 전해 내려온다. 꽃샘추위가 그만큼 매섭다는 뜻이다.

꽃샘추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하나비에(花冷え)라고 한다.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사이에서 난 딸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에게 납치됐다가 1년 중 3분의 1은 하계에서 하데스의 아내로 지내게 됐다. 봄마다 지상으로 나왔지만 지하세계를 생각하는 날이면 꽃샘바람이 불어 겨울 못지않은 추위가 닥쳐온다고 한다.

춘분인 어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눈이 내렸다. 산간지역에는 대설주의보·대설특보가, 해안·도서지역에는 강풍주의보·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곳이 많다. 심리적으로 위축될 때다. 김달진은 시 ‘화로 앞에’에서 “꽃샘 봄바람이 으스스 추워라,/ 캐묵은 장지 종이는 어이 슬픈 것이뇨?”라고 읊었다. 장지문 우는 소리를 슬프게 느끼게 하는 고독감을 표현했다. 박완서는 소설 ‘나목’에서 “나는 꽃샘추위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꽃샘추위가 몰려올 때는 일교차도 커져서 뇌졸중 등 뇌혈관질환 환자가 급증한다고 한다.

마지막 고비다. 며칠 지나면 들과 산에 새싹이 트고 어느덧 완연한 봄에 접어들게 된다. 추위를 견뎌낸 이들은 봄꽃 향기로 보상받을 것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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