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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전문기자의 '뉴스 저격'] 벤츠·도이체방크까지 사냥한 중국… 유럽은 '차이나 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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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中, EU투자 작년 650억유로 7년새 32배… 유럽기업 잇단 M&A에 독일·프랑스 등 충격]

지리車, 법망 피해 다임러 최대주주 올라

메이더, 獨 최대 로봇제조社 쿠카도 인수

獨·佛 등 작년부터 투자심의제 도입… 자국 기업·첨단기술 지키기 안간힘

중국의 전방위적인 유럽 기업 사냥을 경계하는 '유럽 약탈론'이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의 대(對)EU 직접 투자액(FDI)이 2010년 20억 유로에서 2017년 650억 유로(약 85조5430억원)로 폭증했다. 그러나 EU가 긴장하는 이유는 투자액 증가 때문이 아니다. 장기 경제 침체를 겪어온 EU 입장에선 FDI가 '가뭄에 단비'처럼 반갑다.

문제는 중국이 전략적 가치가 높은 유럽의 첨단 기술기업만을 물밑에서 사들여 고급 기술을 탈취하려 한다는 데 있다. 올 2월 말 중국 지리(吉利)차는 메르세데스-벤츠를 생산하는 다임러의 지분 10%를 은밀히 확보해 하루아침에 최대 주주가 됐다. 3% 초과의결권을 가진 투자자의 신고 의무 조항을 회피하기 위해 지리는 파생상품 등 복잡한 금융거래 기법을 동원한 사실이 드러나 독일 정부와 의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中, 유럽 첨단 기술기업 '사냥'…제조 强國 목표

유럽 약탈론은 2016년 5월 중국 메이더(美的)가 독일 최대 산업용 로봇 제조사인 쿠카(Kuka)를 45억유로에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당시 "핵심 기술기업들이 중국에 줄줄이 넘어간다"는 위기론이 고조됐다. 이후 중국 기업 투자를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는데도 허(虛)를 찔린 것이다. 작년 2월부터 중국 HNC사는 도이체방크의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최근 9.9%를 확보한 최대 주주가 됐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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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중국 기업의 '진짜 의도'이다. 리슈푸 지리자동차 회장은 독일 매체와 인터뷰에선 "다임러 지분 인수 자금의 1센트도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게 없다. 다임러 기술을 빼내려는 의도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 관영 CCTV에선 "이번 투자가 국가 전략의 일환이며 특히 다임러의 전기 배터리에 관심이 크다"고 말했다. 2049년까지 ▲항공 우주 장비 ▲고정밀 수치제어·로봇 ▲신에너지 자동차 등 10개 부문에서 미국·독일에 버금가는 제조업 강국(强國)이 되겠다는 '중국 제조 202' 전략의 일환임을 시인한 것이다.

올 1월 중국 중원해운항구(中遠海運港口)가 벨기에 제2의 항구인 제브뤼헤의 컨테이너 터미널을 인수한 것도 주목된다. 중원해운항구는 2016년 그리스의 피레우스 항구의 지분 67%를 3억6850만유로에 인수한 장본인이다. 피레우스 항구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서 유럽에 상륙하는 핵심 교두보가 되고 있다. EU의 맹주 격인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은 중국의 이런 움직임을 막기 위해 지난해 투자 심의(screening) 제도를 도입했다. 올 1월 중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브루노 르 마리 재무장관은 "중국의 장기 투자는 환영하지만 심의를 강화해 프랑스 자산이 '약탈'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스·헝가리 등 親中 행보…EU 틈새 파고들기

하지만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에 허덕이는 EU의 '변방 국가'에 이런 조치는 꿈같은 얘기다. EU의 긴축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그리스, EU 보조금을 받으려면 민주주의와 법치를 먼저 회복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폴란드와 헝가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국은 실제로 이 3개국에 '조건 없는 거금'을 지원해 오고 있다. 코스타스 다우지나스 그리스 의회 외교·국방위원장은 최근 "모두가 그리스를 피 빨아먹는 '벼룩'인 것처럼 대할 때, 중국은 계속 풍부한 돈을 대줬다"고 했다.

중국은 EU 내 선진국에선 첨단 기업을 노리지만, 주변국에선 항구·철도·도로 건설 같은 인프라에 눈독 들이고 있다. 중국이 2012년부터 유럽 대륙의 가난한 중·동부국가(CEEC) 16개국과 '16+1'이라는 '경제협력체'를 결성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16개국 중 11개국이 EU 회원국이다. 단일시장·관세동맹에다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3중(重) 공동체인 EU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이다.

작년 11월 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16+1'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커창 총리는 이 지역에 30억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의 노력은 작년 6월 제네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중국 인권을 규탄하는 EU의 성명이 28개 회원국 중 그리스의 유일한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것. 그다음 달, 브뤼셀의 EU 본부가 중국의 남중국해 암초 군사기지화 움직임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려 할 때도, 그리스와 헝가리는 반대표를 던졌다. 국제법을 무시하는 중국을 EU 회원국이 옹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달 "유럽이 중국에 대해 '한목소리'로 얘기하지 않으면, 유럽은 중국에서 볼 때 그저 아시아에 딸린 반도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이 아시아~북아프리카~유럽을 잇는 일대일로 정책을 위해 인프라 건설, 재정 지원 같은 '당근'을 제시할 때, EU 내 경제 3위국인 이탈리아조차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게 유럽의 현실이다.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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