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서류엔 주 52시간, 근무는 70시간… 퇴근 도장 찍고 야근합니다"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주 52시간 근무요? 일은 똑같이 하는데 월급만 줄었어요. 한마디로 무료 봉사하는 거죠."

올 초부터 주 52시간 근로 시범 적용에 들어간 한 대기업 직원들 사이에선 불만이 나오고 있다. 당장 인력 대체가 어려운 연구개발(R&D) 직군에서 서류상으로만 52시간 근무로 기록하고, 실제로는 60~70시간 이상 일하는 '유령 근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근태(勤怠) 관리 시스템에 거짓으로 흡연·휴식 시간을 기재하거나, 출입증을 미리 찍어 퇴근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고 한다. 익명 게시판 서비스인 '블라인드'와 취·창업 사이트 게시판 등에는 이 같은 불만이 다수 올라와 있다. 한 개발자는 "업무는 똑같이 하는데 52시간만 일한 것으로 기록되니 야근 수당은커녕 교통비까지 못 받고… 대체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업도, 직원도 "혼란스럽다"

주 52시간 시범 운영에 들어간 다른 기업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인사(人事) 부서에선 '무조건 지키라' 하고 상사들도 '퇴근하라'고 하는데, 업무량은 줄여주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성과를 요구하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택근무나 유령 근무를 한다는 것이다. 한 스마트폰 개발자는 "오후 5시 30분이면 무조건 퇴근해야 하는데 오후 4시 넘어 오류 리포트가 들어오면 당일에 대응하기 어렵다"면서 "정시 퇴근하고 다음날 출근하면 팀장이 '왜 처리를 안 했느냐'고 질책하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말했다. 디스플레이업체의 한 직원은 "상사가 자연스럽게 '집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다"고 했다.

조선비즈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하는 LG전자 직원들 -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LG전자 서초R&D캠퍼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해 통근버스에 올라타고 있다. /이진한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뚜렷한 대안(代案) 없이 급하게 시행하다 보니 일은 일대로 하고, 월급만 깎이는 어정쩡한 예행 연습을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중견 제약사의 한 직원은 "실제 현장에선 52시간만큼만 월급을 주고 무료 연장근무를 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오후 5시 30분 퇴근제를 도입한 한 대기업의 경우 회사 근처 카페에 노트북을 펴놓고 야근하는 직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기업들도 고심하고 있다. 주말을 끼고 해외 출장을 가면 근로시간이 주당 52시간을 넘길 가능성이 높고 바이어 접대 등 저녁 약속이 잦은 영업 부서는 식사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전자업체의 한 임원은 "부서장이 공식 소집한 회식도 근로시간에 포함된다고 하니 회식하기도 조심스럽다"고 했다.

조선비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부는 추가 채용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지만 기업들은 추가 채용보다는 자동화와 업무 효율 개선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다.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근로시간 단축 영향에 대한 정교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단 상반기에는 추가 채용이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中企 양극화 심화 전망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간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본격 시행되면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의 월급 감소가 더 클 것이라는 국회 예산정책처의 분석 보고서도 나와 있다. 노조의 입김이 센 대기업은 직원들의 줄어든 임금을 어느 정도 보전(補塡)해줄 가능성이 높다. 한 대기업 노무담당자는 "생산직이 기존보다 업무효율을 높이면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줄어든 임금을 보전해줄 계획"이라고 했다. 다른 대기업 경영담당 팀장도 "근로시간은 줄어도 그동안 직원들이 받았던 초과 근무 수당은 다른 명목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반면 중소기업은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고 있어 여력이 많지 않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올해 중소기업의 부담액만 15조원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는 줄어든 임금을 세금으로 보전해주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소기업은 근로시간 단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추가 채용도 쉽지 않아 결국은 기존 근로자들의 임금만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면서 "세금 보전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실효성도 높지 않은 대책"이라고 말했다.

박순찬 기자(ideachan@chosun.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