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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블랙넛, 고의가 아니라고?…힙합은 어쩌다 여혐 음악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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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15년 방송된 Mnet '쇼미더머니4'. 디스랩을 하는 송민호와, 이에 맞서 보란 듯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블랙넛'. [사진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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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를 작성한 건 사실이지만 모욕할 마음을 먹은 건 아니다." 여성 래퍼 '키디비'를 모욕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래퍼 '블랙넛'의 변호인이 지난 15일 법정에서 한 말이다. "이 의견에 동의하느냐"는 재판장 질문에 블랙넛도 "그렇다"고 답했다. 고의성이 없었다는 블랙넛의 얘기를 염두에 두고 그의 가사를 다시 보자.

"난 솔직히 키디비 사진보고 X쳐봤지(곡 'Indigo Child')"
"마치 키디비의 가슴처럼 우뚝 솟았네 진짜인지 가짜인지 눕혀보면 알지(미발매곡)"
"이번엔 키디비 아냐 줘도 안 처먹어 니 bitXh는(곡 'Too Real)"
백번 양보해 모욕할 고의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믿자면, 어쩌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다. 정상적인 예술적 고뇌의 결과가 이러한 선정적인 욕설이란 얘기니 말이다.

계속 되는 지적에도 꿋꿋한 여성 혐오
한국 힙합이 여성을 혐오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판도 계속 되는데, 문제는 반복된다. 지난 1일 공개한 나플라의 '꽃'을 보자. "강남 코 조합 잘됐네", "너의 꽃 같은 얼굴에 살짝 묻은 된장", "너와 어울리는 soy bean paste(된장)", "top 10 안에 들어가니 보는 눈이 이젠 달라졌니 한두 살 오빠보단 비싼 아저씨에게 open up wide" 등. 그 자체로 혐오적 개념인 '된장녀'를 정의하고 이를 비난하고 있다. 직접적 욕설 등을 피해 표현을 에둘러 쓰지만 곡 자체에 여성에 대한 혐오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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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블랙넛. [사진 블랙넛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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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는 차고 넘친다. 2015년 위너의 송민호는 Mnet의 '쇼미더머니4'에서 "딸내미 저격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가사로 비판에 직면하자 사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에픽하이의 곡 '노땡큐'에 참여해 "MotherfuXXX만 써도 이젠 혐이라 하는 시대, Shit"이라고 노래하며 앞선 사과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블랙넛의 곡은 여성 혐오에 그치지 않고 "X신들 뭉쳐서 개폼 잡네 끼리끼리 휠체어 끼릭끼릭(곡 'Too Real)", "감추지마 니 진심 치매 걸린 노인 X꾸녕처럼(곡 'Indigo Child')"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까지 심심찮게 내비친다.

힙합 예능 이어지며 주목 받은 언더 힙합
'쇼미더머니', '언프리티랩스타' 등 힙합 예능이 인기를 끌면서 2010년대 '대중음악'으로서의 힙합 전성시대가 열렸다.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등이 랩하는 댄스 음악으로 힙합의 맛보기를 대중에게 소개했던 1990년대 이후 '언더' 힙합이 이처럼 많은 대중의 주목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여전히 '쇼미더머니' 등 힙합 예능에 나온 일부 언더 힙합만 주목받는 상황이긴 하지만 힙합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사실이다.)

격이 달라진 힙합엔 새로운 옷이 필요했지만 '언더'에서 향유하던 힙합은 여전히 거친 옷매무새를 보였다. 여성 혐오적 표현을 내뱉었던 힙합의 관성은 이어졌고, 스스로 화자가 돼 자기 얘기를 풀어냈던 장르 특성상 과격한 표현으로 진정성을 확보하고 카타르시스를 분출했다. 윤광은 문화평론가는 "2000년대 후반 '스웨그(swag·자기과시적 멋)' 등 미국 힙합의 메인스트림적 흐름을 분별 없이 받아들이고 뒤이어 '쇼미더머니'와 같은 힙합 예능이 등장하면서 힙합이 상업화되는 현상이 겹치면서 부각된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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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방송된 Mnet '쇼미더머니4'. '블랙넛'과 송민호가 랩 디스배틀을 하고 있다. [사진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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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선정적인 말로 상대를 당황하게 해야 디스배틀(디스는 'Disrespect'의 준말·상대를 비방하는 랩 대결)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힙합 서바이벌 예능'을 거치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 거세졌다. 2015년 송민호는 '산부인과' 가사 논란에 대해 "쟁쟁한 래퍼들과의 경쟁 프로그램 안에서 그들보다 더 자극적인 단어 선택과 가사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고 밝혔다.

'디스' 전은 힙합이 가진 원초적 공격성과 에너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켜준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선정성·과격성이 심화하면서 마치 욕설과 분노로 점철된 디스전이 힙합의 전부(혹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 결과도 초래했다. 그 과함이 힙합이 낯선 이들에겐 생소하게 비칠 정도였다. 지난해 유병재는 스탠딩 코미디 '블랙코미디'를 통해 힙합의 디스전을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디스전하는 두 힙합 가수가) 초면인 경우도 있고, 며칠 전에 보신 분도 있고 원래는 형, 동생하는 친한 사이일 수 있는 분들인데 랩배틀만 시작되면 'X 같은 마더XX X새끼야 총만 있다면 널 쏴버릴 거야 과녁은 필요 없어 네 XX에 헤드샷 탕탕탕'…중략…아 힙합은 감정노동이구나"


힙합은 원래 그런 음악? 절반만 맞는 말
이같은 비판에 흔히 나오는 반박 중 하나가 "힙합은 원래 그런 음악"이란 소리다. 이는 절반만 맞는 얘기다. 음악 웹진 '리드머'의 편집장 강일권 대중음악평론가의 얘기다.

"60~80년대 미국 게토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 범죄와 폭력이 만연한 환경에서 형성된 힙합엔 자연스레 마초적인 스트리트 언어와 질서가 녹아들었다. 그런데 한국의 힙합은 이에 대한 이해나 고민 없이 그저 마초적 특성이란 힙합의 외형만 관성적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에서도 종종 약자 혐오 가사가 문제되지만, 힙합씬 내에서 건설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합의가 이루어지고 발전하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아티스트와 팬들은 '힙합은 원래 그런 음악'이라는 무책임한 말로 모든 비판을 피해가려 한다."


나플라의 '꽃'에 대한 대중의 비판에 팬들이 "일반 여성이 아닌 '된장녀'만을 비판하는 내용"이라며 "'힙알못'들이 힙합을 도덕책으로 만들려 한다"고 반박하는 것도 비슷하다. '된장녀'라는 개념 자체가 여성 집단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이 대답은 시대착오적이거나, 무지하거나, 무책임할 뿐이다.

당연하고도 뻔한 말이지만 장르적 특성도, 예술과 표현의 자유도 사회·규범적 기준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힙합이 본디 무책임한 음악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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