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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한국 가요 100년 꿰뚫은 키워드는 恨 아니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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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가'부터 방탄소년단 노래까지… 국어학자 한성우, 2만6000곡 분석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계절은 '봄'

연인 호칭은 '선생님'서 '오빠'로

1926년 윤심덕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노래했고, 2009년 바비킴은 '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 언제나 난 늘 빈털터릴 뿐'이라 읊었다. '한국 가요 100년'을 관통한 키워드는 '한(恨)'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최근 저서 '노래의 언어'(어크로스)를 낸 한성우(50)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우리 가요 2만여 곡 중에서 '사랑'은 제목에 1608회, 가사에 4만3583회 등장해 명사(名詞) 중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일상 언어에서 104위에 그치는 '사랑'이 노래 속에선 날개를 얻었던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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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노래의 언어'를 쓴 한성우 교수는 연구실에 갖다 놓은 턴테이블로는 주로 클래식 LP를 듣고, 가요는 대학생 제자들처럼 스트리밍을 통해 듣는다. 그는“유행가 노랫말은 대중의 꿈과 생활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언어”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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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인 한 교수는 '희망가'부터 방탄소년단의 K팝까지 한 세기 동안 발표된 한국 대중가요 노랫말에 대한 인문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대중이 즐겨 쓰는 말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언어를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감정과 시대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행가만 한 게 있을까요?"

자료 채록부터 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부르는 노래'란 기준을 세워 노래방 가사를 일일이 내려받고 '한국가요전집'이란 책을 토대로 빠진 가요를 보완한 뒤 띄어쓰기 등 교정 작업을 했다. 그 결과 2만6250곡, 원고지 7만5000장 분량의 자료가 마련됐다. 당대 유행가 가사를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신라 향가집 '삼대목' 편찬을 연상케 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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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노랫말은 시대 변화를 담고 있었다. '사랑'이란 말이 쓰인 노래는 1950년대까지는 전체 노래의 2.19%에 그쳤으나 2000년대 이후엔 '러브'까지 포함해 65.22%로 폭증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세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여성이 사랑하는 대상을 표현하는 2인칭은 과거엔 '선생님'이 대세였으나 이젠 '오빠'로 바뀌었다. 해외여행이 금지됐던 시절엔 '마도로스'란 직업이 가사에 유독 많이 등장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1968년 펄시스터즈 노래에 등장하는 '다방 커피'는 2010년 10㎝의 노래에선 '아메리카노'로 변신하지만, 술은 시대를 관통해 언제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고 있었다.

뜻밖의 결과도 있었다.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계절은 가을일 것 같지만, 실제는 봄(1572회), 겨울(1281회), 여름(1001회)에 이어 꼴찌(541회)였다. "'가을 편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처럼 감정의 울림이 큰 노래들이 사람들 기억에 더 크게 각인됐을 뿐"이란 분석이다. "사랑의 아픔이나 가는 세월에 대한 회한이 우리 가요에 많은 것은, 청승에 젖고 통증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묘한 쾌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처럼 말이죠."

초고에 1980~90년대 노래가 너무 많아 편집자와 늘 다퉜다는 한 교수는 "'젊으면 요즘 노래, 나이 들면 옛날 노래를 좋아하게 된다'는 통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든 노래의 '표준말'은 청년의 언어입니다. 그러니 어느 연령대든 자신이 젊었을 때 노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그도 방탄소년단의 '팔도강산'을 듣고는 무릎을 쳤다고 했다. "지역마다 독특한 사투리가 결국 다 통하는 한국말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어요. 방언을 연구하는 제가 학생들한테 늘 해주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노래 중 그를 가장 감동시킨 가사는 무엇일까. "강산에의 '…라구요'입니다. 과거와 현재, 역사와 정서를 통찰하는 보기 드문 가요지요. 노래방에서 부르고 싶은 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아, 사실은 제가 음치라서 그냥 흥얼거리기만 합니다만…."




[인천=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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