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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개인정보 보호’ 앞세운 ‘국민 알 권리’ 침해…박근혜 판결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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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한겨레

2015년 5월7일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단지 기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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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판결이 선고되면 출입기자들에게 기사 쓰는 데 참고하라며, 외부로 유출은 말아달라며 판결문을 줍니다. 짧은 시간 안에 판결문을 훑고 핵심 내용을 추려 쓰려면 정말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입니다. 그럴 때 한마디씩 합니다. “그냥 판결문 이거 인터넷에 그대로 올리면 안 되냐.”

<오마이뉴스>가 이를 실현했습니다. 지난달 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2심 판결문을 자사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물론 기사 쓰기 힘들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사건의 본질과 판단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읽고 꼼꼼히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의도였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법조기자단 출입정지 1년이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까지 1·2심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기자단 관례를 따르지 않고 사전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법과 관련해 판단이 서지 않을 땐 헌법을 보면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헌법은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109조)고 돼 있습니다. 이 헌법 조항에 따라 재판은 국민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합니다.(국가 안전보장, 피해자 보호 등을 목적으로 비공개로 열릴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극히 일부입니다) 당연히 판결(문)도 국민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사건 당사자가 아닌 ‘국민 누구나’가 판결문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입니다. ①서울 서초동 법원도서관을 방문해 검색하고 열람하거나 ②비실명 처리된 판결문 사본을 이메일이나 우편 등으로 신청해 받아보거나 ③확정된 형사(2013년 이후)·민사(2015년 이후) 판결문을 인터넷으로 열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양한 방법이 잘 갖춰진 듯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딱히 그렇지 않습니다. ①을 하려면 직접 서울 서초동 법원도서관을 가야 합니다. 검색 가능한 컴퓨터는 고작 4대. 한 명이 쓸 수 있는 시간도 1시간30분으로 제한되고 인쇄를 할 수도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2주까지만 가능한 사전예약은 언제나 꽉 차 있습니다. 무작정 찾아가서 ‘운좋게 생긴 빈자리’를 기다리는 게 현명할 지경입니다.

많이 쓰는 방법은 ②인데, 이를 이용하려면 해당 법원과 사건번호를 알아야 합니다. 이재용 항소심 사건번호(2017노2556)는 기사에도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③은 더 가관입니다. ③을 이용하려면 당사자 이름까지 알아야 합니다. 통합된 열람 사이트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을 알고 싶다면 1심 판결문은 서울서부지법 홈페이지에, 2심은 서울고법, 3심은 대법원 홈페이지로 가야 합니다. 크롬 브라우저에선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익스플로러에서만 가능합니다. 대법원 선고가 나지 않은 사건은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힘겹게 받은 판결문엔 사람 이름도 소속된 회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피고인 A는 주식회사 V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런 식입니다. 이런 비실명 처리된 판결문마저도 당사자가 비공개 신청을 하면 일반인은 볼 수가 없습니다. 조 전 부사장 판결문은 상고심(대법원 2015도8335)만 인터넷 열람이 가능하고, 이재용 부회장 판결문은 1·2심 모두 이 부회장의 요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신청을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박근혜 국정농단 1심 선고 재판이 다음달 6일 열립니다. 이 부회장도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법원은 ‘개인정보 보호법’을 이유로 판결문 공개에 소극적입니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17조)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결문 당사자가 법원이나 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국민의 알 권리와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니 국회에서 법을 바꿔주면 공개 범위를 더 확대하겠다고 합니다.

실제 그런 소송이 있기는 했습니다. 법원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있고 그렇지 않은 판결도 있습니다. 1심에서 법원 책임이 인정된 사례를 보면, 가사사건에서 미성년자인 자녀들의 이름을 비실명 처리하지 않고 판결문을 공개한 일이었습니다. 개인정보 보호와 알 권리의 충돌 같은 걸 따질 필요 없는, 담당자의 과실에 해당합니다. 이 부회장의 판결문을 비공개로 돌리고, 조 전 부사장 판결문을 보지 못하게 막는 근거가 되기엔 부족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런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에 이 부회장 판결문 전문을 인터넷에 올렸다고 합니다. 다른 기자들이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자들이 받는 ‘속도’로 국민 누구나 판결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판결문은 공공의 자원입니다. 법원이 독점하면서 마치 인심 쓰듯 일부 선택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박현철 토요판팀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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