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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Why] "좋은 판결, 판사 소통 능력에 달려… AI가 대신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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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의 IT 전문가' 서울고법 강민구 부장판사

지난달 5일 청와대 청원 코너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더는 없도록 인공지능(AI) 판사 도입이 시급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판사 불신 시대. AI가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실제로 미국 뉴저지 등 일부 주에서는 재판 전 피의자의 보석 여부를 결정할 때 AI를 사용한다. 피의자의 나이와 전과 경력 등 위험 요소를 기반으로 판단하는데, 편견을 줄 수 있는 인종·성별·옷차림·주소지 등은 배제한다. 판사의 선입견 때문에 부당한 결정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다. 2013년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2030년까지 판사라는 직업이 AI에 밀려 사라질 확률이 40%에 달한다고 밝혔다.

강민구(60)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법조계의 IT 전문가다. 그가 1999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사법정보화 특별 과정을 연수하고 기록한 보고서는 국내 전자 법정의 기초가 됐다. 최근엔 유튜브에 '에버노트와 한글 연동 방법 시연' 등을 올리는 1인 방송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1월 부산지방법원 법원장 시절 한 강연은 조회 수 126만회가 넘기도 했다. 지난 2월에는 '인생의 밀도'라는 책도 출간했다.

조선일보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마이크를 이용해 음성 인식으로 구글 독스에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시연하는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조계 대표적인 IT 전문가인 그는 “판사도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변화해야 한다”면서도 “좋은 판결은 감성적인 부분도 필요하기 때문에 인공지능(AI) 판사로 대체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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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판사는 책상 위 4개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음성 인식으로 구글 독스에 문서를 작성하는 것을 시연했다. 그는 "김진명 작가가 2년전 손가락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이 방법을 알려줬더니, 너무 좋다며 앞으로는 이걸로 작업하겠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음성 인식 시스템을 어떻게 사용하게 됐나.

"2014년 6월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날 마산 저도로 등산을 갔는데 판결과 관련된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나 내겐 펜도 메모장도 없이 스마트폰 하나만 있었다. 음성 인식을 한 번 써봤는데 80% 수준까지 적혔다. 그때부터 에버노트, 구글독스 등 첨단 기능들을 공부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음성 인식 기능이 재판장에서 필요하나.

"몇 년 전 중국 상하이(上海)와 항저우(杭州) 법정에 갔더니 속기사가 없더라. 이미 음성인식 프로그램이 일부 법정에서 속기사를 대체한 것이다. 내가 음성인식 기능의 전도사가 되니 속기사들은 날 미워한다. 내가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빼앗는 게 아니라 인간이 좀 더 나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어느 보고서에 보니 AI가 발달할수록 일자리를 빼앗길 확률이 높은 직업 5위가 판사더라. 빼앗긴다고 막아야 하나? 우리가 더 배워야 한다."

―언제 처음 컴퓨터를 접했나.

"1985년 5월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발령났을 때다. 멍텅구리 터미널이라고 모니터와 키보드만 있는 거였다. 이걸로 공문 처리를 하라고 했는데, 태어나서 처음 본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파스칼 등 컴퓨터 언어를 배웠다."

―재판에 처음 써먹은 건 언제인가.

"1988년 조립형 PC가 중고차 한 대 값일 때다. 개인 비용으로 PC를 사서 로터스(지금의 엑셀)를 깔아 공부했다. 당시 군인·공무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 60세까지 호봉 승급을 호프만 계수로 계산해야 했다. 그게 복잡하다. 판사가 계산하고, 비서가 계산하고, 가족이 계산하고, 제삼자가 계산해 맞아야 한다. 판결에 며칠이 걸린다. 내가 의정부 지원 19명 동료 판사를 불러 30분 만에 로터스로 결과 값을 받아내는 시연을 했다. 그걸 본 판사들이 전부 컴퓨터를 샀다. 그들이 박시환 전 대법관,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등이다."

―1999년 미국 버지니아주 연수 기록은 국내 전자 법정의 기초가 됐다.

"미국 연수 전후로 국내 기존 판례들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등 전자법정 체계를 만들었다. 원래 변호사들이 소장이나 준비 서면에 판례를 인용해야 하는데, 그때까진 몰라서 못했다. 판사들의 정보 독점이 있었던 것이다. 전자 법정으로 판사와 변호사의 무기가 같아진 것이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깨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AI에 판사 자리가 빼앗길까.

"내가 어릴 적 아버지가 일찍 사고로 돌아가셨다. 학창 시절엔 농사짓다가, 공부하다가, 또 소 먹이는 풀 뜯으러 가는 것이 삶이었다. 한번은 빨리 풀을 뜯고 공부하려다 손을 베여 자국이 남았다. 당시 병원도 멀어 된장 바르고 천으로 동여맨 것이 지금 큰 상처로 남았다. 가끔 농사짓는 분들 합의가 필요할 때 내 손을 보여주면 원고 피고 둘 다 '판사님도 꼴(풀) 베었습니까' 이런다. 마음의 빗장을 확 풀어버린 후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폭포처럼 한다. 듣기만 해도 사건의 실체가 다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재판은 '소통'을 해야 한다. 그 일을 AI가 할 수는 없다."

―최근엔 사람 판사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

"그래서 더욱 판사들도 IT를 배우며 국민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위급 기관장 중에 아직도 카카오톡을 안 쓰는 사람이 절반이다. 국민 메신저도 모르면서 국민과 소통할 수 있겠느냐."

―요즘은 소셜미디어를 너무 많이 써서 문제 아닌가.

"공인이라는 생각과 원칙을 갖고 써야 한다. 난 단톡방 회의를 많이 하는데, 근무 시간에만 사용한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페이스북도 업무시간이나 술 마시고 나서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 검열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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