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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한 발 앞선 ‘학교 안 미투’는 왜 번지지 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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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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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연합회 회원들이 서울 명동거리에서 미투 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행진을 벌이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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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성희롱했던 선생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어요. 학생 성희롱으로 직위해제 당하셨는데 어떻게 다시 오실 수 있나요?”

교육청 학생인권센터에서 성인권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ㄱ씨는 지난해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학생이 교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뒤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알려 학교에서 이 교사를 직위해제 했는데, 교사가 수사기관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자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단에 선 것입니다. ㄱ씨는 “법과 행정절차를 설명했지만 그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단 마음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육 분야를 취재하는 김미향 기자입니다. 최근 ‘미투 운동’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라면 예외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미투 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바로 ‘학교’입니다. 2016년 서울 서문여중·고와 예일디자인고, 2017년 경기 안양예고 등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겪은 성희롱·성추행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밝혔습니다. 교과서를 쉽게 설명한다며 선생님이 수업 중에 음담패설을 하고, ‘생활 지도’를 핑계로 성희롱·성추행을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교복 치마가 짧다며 학생 다리를 만지거나 속옷 색깔을 지적하는 등 복장검사 명목으로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당했다’는 미투 운동이 학교에서는 일찌감치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10대 청소년들의 절박한 외침은 학교 문화를 통째로 바꾸는 전국적 미투 운동으로 번지지 못했습니다. 일부 일탈 교사들이 저지른 예외적인 사례일 뿐 ‘학교 안’ 고질적인 병폐로 인식하지 못한 거죠. 더군다나 미성년 학생들이 익명으로 ‘믿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비판이 함께 제기되면서 외려 역풍까지 불었습니다.

성인들의 미투 운동보다 한 발 일찍 시작됐음에도 왜 10대들의 ‘학교 미투 운동’은 개별 학교의 문제로 그치고 말았던 것일까요. 주된 이유는 교실 안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교사가 학생들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막기 때문입니다. 안양예고 학생들은 교사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학생들의 제보글을 모아 올 초 <여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지난해 교사들의 성희롱·성추행이 에스엔에스(SNS)에 대거 폭로됐는데도 교사들이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경징계로 마무리되자, 허탈한 학생들이 나서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결코 잊지 말고 재발을 방지하자며 책을 낸 것입니다. 책에는 교사들의 학생 외모 차별, 여성 혐오 발언, 성희롱·성추행 행태들이 상세히 담겼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학교장과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허위사실 유포’라고 공격하며, 학내에 비치된 책을 모두 폐기해버렸습니다.

교사들은 대개 ‘학교 명예’를 운운하며 학생 입을 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교 졸업생 박아무개(20)씨는 “고3 때 학교에서 벌어진 성희롱·성추행 사건이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올라오자 생활지도부 선생님이 글 올린 학생을 불러 ‘학교 일 인터넷에 올리지 말라’고 크게 혼을 냈다”고 했습니다. 또한, 여전히 교사들 사이에서는 ‘형사처벌을 면하면 문제없다’는 안이한 인식이 만연해 있습니다.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법적 처벌에 이르려면 뚜렷한 입증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미성년자인 10대들의 진술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등 형사처벌이 쉽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문제가 된 교사들은 경징계에 그치고 교단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경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밝힌 ‘초중고 교원 성비위 징계현황’(2013~2016년) 자료를 보면, 성비위로 징계받은 교원 258명 중 111명(43%)이 교단에 계속 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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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적 책임을 면했다고 해서 교육자로서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학생들의 성희롱 피해 호소로 해임된 교사가 교단으로 복귀한 사건에 대해 학교가 교사를 해임한 것이 정당했다고 판단하며 “검찰에서 ‘혐의 없음’의 불기소 처분을 받기는 했으나 학생들이 수사기관에 출석해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어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고,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만으로 교사의 비위 정도가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육부는 지난 5일 교육분야 성희롱·성추행 대책 티에프(TF)팀을 만들고 적극 신고받기로 한 상태입니다. 교실은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교사가 벌점 같은 징계 권한까지 갖고 있어서 학생이 교사의 권력에 저항하기 힘든 곳입니다. ‘찍히면 대학에 못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넘어 자신의 피해를 알린 학생들을 우리가 지켜줘야 할 때입니다.

김미향 사회에디터석 사회정책팀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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