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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TF현장] "도시재생? 월세만 올랐다" 한숨 내쉰 세운상가 터줏대감들(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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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째 세운상가를 지키고 있는 소형모터 제작·판매업자 임 씨는 자신이 개발한 모터가 값싼 중국산 모터에 밀리는 현실을 토로하며 "과거 세운상가의 위상이 그립다"고 했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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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 | 종로=김소희 기자] "또 취재하면 무엇하려고? 배 곯는 건 그대론데."

지난 9월 도시재생을 통해 '다시 세운'으로 재탄생한 세운상가에서 25년 넘게 가전제품 도매를 하고 있는 박모(52) 씨는 재개장 6개월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대뜸 이렇게 답했다. 박 씨는 "세운상가가 재개장 하고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며 "언제 문 닫을지 장담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2일 오후 <더팩트> 취재진이 찾은 세운상가는 한산한 분위기였다.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은 있었지만, 대부분 50대가 훌쩍 넘어보이는 듯한 이들이었다. 오랜만에 들려온 인기척에 상인들은 가게에서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렸지만, 손님이 아니라고 판단되자 보고 있던 TV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보여주듯 이날 상인들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37년째 소형모터를 제작·판매하고 있다는 4층 상인 임모(61) 씨는 "자녀를 다 키웠으니 망정이지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굶어 죽기 딱 좋다"며 "앞으로 3년이 저에겐 마지노선"이라고 했다. "더 이상 세운상가를 지키고 있을 힘이 남아있지 않다"고도 했다.



서울시 종로구에 설립된 약 1㎞ 길이의 세운(世運)상가는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이 담긴 1968년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1970~1980년대 한국 전자 산업의 메카로 호황을 누리면서 70년대판 타워팰리스라 불리기도 했다. 당시 전국 최고급 기술자들이 이곳으로 모이면서 세운상가에서는 로켓도 만들 수 있다는 풍문도 있었다.

이곳의 쇠퇴는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면서 시작됐다. 이후 한-중 수교로 중국산 전자 제품이 1990년대 국내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유일한 종합 가전제품 상가였던 세운상가의 경쟁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로 세운상가의 주 거래처였던 중소기업마저 무너지면서 쇠퇴는 가속화 됐고, 세운상가는 어느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이날 직접 둘러본 세운상가는 옛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용했다. 수십 년 경력의 기술 장인들이 여전이 이곳에서 TV, 라디오, 전화기, 특수고무금형 등 각종 제품을 판매하고 단종된 제품까지 수리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지만, 어떠한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마주하기 위해 '멍한' 표정으로 가게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 상인들 "애시당초 건드릴 수 없는 구조"…불씨만 키운 '메이커스 큐브'?

세운상가는 '박원순표 도시 재생'의 대표 사업으로 손꼽힌다. 서울시는 2014년 도심의 보행로를 늘리고 낙후된 세운상가 일대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세운상가를 철거하는 대신 재생을 선택했다. 다시 세운 프로젝트에는 535억2700만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세운상가 건물은 역사성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돼 보존이 결정됐다.

3년 6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세운상가는 지난해 9월 19일 재개장 했다. 재생 사업 1단계인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의 3층 양 날개에는 500m 길이의 보행로가 생겼다. 남산까지 이어지는 삼풍상가~진양상가~남산순환(2단계) 구간은 2020년 준공 예정이다.

현재 세운상가 9층에는 세운상가와 그 일대를 문화·관광 명소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걸맞게 전망대, 텃밭, 쉼터 등이 조성됐다. 서울의 도심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을 '서울 옥상'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건물 3층에는 스타트업 창작 공간인 '세운 메이커스 큐브(이하 메이커스 큐브)'가 마련돼 38개 기업 및 단체가 입주했다.

세운상가 상인들은 이 같은 재생 사업에 "우리의 생각은 존중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임 씨는 "우리 가게 문틀과 천장을 보면 알겠지만, 언제 허물어질지 모를 정도로 낡았다"며 "역사적 가치는 차치하고, 서울시도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재생 사업 초기를 회상했다. 임 씨는 "세운상가 건물주, 땅 주인, 세운상가를 구성하는 400여 점포의 주인들이 모두 제각각인 탓에 허물지도 못하고 겉만 바꾸게 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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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이 내려 앉은 세운상가 내부.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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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서 전자제품 도매점을 하고 있는 김모(61) 씨도 "4층 계단만 무너진 원래 상태 그대로"라며 "2,3층은 상인들이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2,3층 계단만 겨우 고쳤다. 이 역시도 2년이 넘게 주장한 결과 이뤄낼 수 있었다"며 임 씨의 주장을 거들었다.

상가 3층 보행로 위에 조성된 스타트업 창작 공간 메이커스 큐브 역시 상인들의 불만에 불씨를 지폈다. 익명을 요구한 세운상가 한 관계자는 "메이커스 큐브 먼저 둘러보라"면서 "청년발명가들을 모셔왔다고 하는데 매일 텅텅 비어있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더팩트> 취재진이 방문한 이날, 세운상가 양 옆에 들어선 메이커스 큐브는 상인들의 말처럼 조용했다. 메이커스 큐브 벽의 일부는 유리로 돼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데, 불이 켜진 메이커스 큐브는 단 4곳에 불과했다. 오히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세운상가 내 상점은 불이 밝게 켜져 있는 것과 대조됐다.

김 씨는 "메이커스 큐브가 들어서고 서울시에서 지원한다고 하니까 가게 주인이 대뜸 월세를 올리겠다고 하더라"면서 "뉴스에서는 공중보행교 때문에 관광객이 몰린다고 하지, 사람은 오지도 않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실제 세운상가 일대 임대료는 오름세를 탔고, 20~30만 원대 였던 세운상가 3층 점포 임대료는 50~60만 원까지 치솟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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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보이지 않는 4층 계단은 방치돼 있다. 보이는 곳만 강력히 요구해 겨우 리모델링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왼쪽은 방치돼 있다는 4층 계단, 오른쪽은 새 계단.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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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다시 세운'은 장기 프로젝트"…모두가 바라는 '세운의 봄'

서울시는 상인들의 주장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충분한 소통 과정이 이뤄진 끝에 '다시 세운'이 재개장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시 다시세운사업팀 이창구 팀장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전체 450여 명의 세운상가 상인들, 1단계 구간에 위치한 1203곳의 상인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세운상가 각 층별로 의견을 수렴했을 뿐더러 상인연합회로 구성된 이사회와도 1년 넘게 소통을 해서 이뤄진 게 '다시 세운'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오랜 논의 끝에 무허가 점포로 가득찼던 상가의 공실도 상당수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이 팀장은 "3층 보행데크 설치 이후 전체 공실이 30% 아래로 줄었다"며 "예전보다 활력을 많이 되찾았음에도 방문객이 모두 판매자로 이어지지 않다보니 상인들의 불만이 해소되지 않는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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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조성된 메이커스 큐브 내부.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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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상인들의 답답함과 속상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각도로 고심하고 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도심 창의제조산업 혁신지로 만든다는 목표로 창업자, 기업 연구소, 예술가·창작자, 소셜 프로젝트 분야 실험그룹 등으로 이뤄진 다양한 청년들을 적극 모집했다.

청년 스타트업이 세운상가의 기술·유통 잠재력과 결합해 새로운 창의제조산업을 견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소위 잘나간다는 기업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꾸려진 메이커스 큐브에서는 미니 전기차와 전기 자전거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매주 세운상가로 초청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현장 체험 워크숍도 진행 중이다. LG재단의 '영메이커스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중견·대기업 등 민간 자금을 세운상가로 끌어들이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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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켜진 큐브 중 한 곳. 메이커스 큐브 대부분 불이 꺼진 상태였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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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스 큐브에 입점한 청년들, 즉 '메이커'들의 활동도 평가 중이다. 서울시는 오는 5월 현재 큐브에 입점해 있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입점 당시 제출한 활동평가서와 세운상가 전통을 지켜온 장인(마이스터)과의 협업을 기준으로 심사해 존치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그램 외에도 4차 산업에 걸맞는 프로젝트를 비롯해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 세운의 번성을 이루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이 팀장은 "'서울 옥상'으로 찾는 이들의 동선이 매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날 2층에서 만난 세운상가의 오랜 단골이라는 김영설(68) 씨는 "세운상가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오래된 카세트나 비디오가 고장날 때면 세운상가를 찾는 이유도 옛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봄이 오면 관광객도 많아져 세운에 봄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ks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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