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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단독]"너낳고 미역국 드셨나"…봇물터진 간호사들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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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협회 인권침해 실태조사에 7500명 익명참여…노동부, 실명신고 130건 조사착수]

머니투데이

삽화=김현정 디자이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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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차 간호사 A씨(33)는 신입 시절 선배들에게 당한 '태움'을 아직 잊지 못한다. 태움이란 들들 볶다 못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은어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가혹하게 가르치는 방식을 지칭한다. A씨는 "업무 시간 외에도 태움은 계속됐다"면서 "당시 근무하던 병원 응급의학과 과장이 남자였는데 회식 때 노래방만 가면 '네가 신규니 같이 춤을 춰드려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A씨는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만 이상하게 돼버리는 분위기여서 그냥 조용히 병원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 "너 낳고 엄마가 미역국 드셨니?" 8년 8개월을 서울 대형병원에서 일한 후 2015년 일반 기업으로 이직한 전직 간호사 B씨(34)는 동기가 선배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B씨는 "조그마한 실수도 환자의 생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일하면서 서로 날카롭고 모진 말을 주고받게 된다"고 말했다. B씨는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병원에서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 괴로워졌다"며 "결국 이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서울 한 대형병원 간호사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이유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이 나온 가운데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대한간호협회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한간호협회는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접수된 피해신고 130여건에 대해 고용노동부에 조사를 의뢰했다.

19일 관계부처와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간호협회는 지난해 12월28일부터 지난달 23일까지 협회 소속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1차 인권침해 실태조사(익명)를 진행했다. 피해자가 실명과 소속을 밝히는 형식의 인권침해 신고도 받았다.

대한간호협회는 국내 간호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자동 회원으로 등록되는 단체로 회원 수는 올해 기준 약 40만명이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이번 조사는 지난해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선정적 장기자랑을 강요했다는 사례가 알려지면서 시작됐다"며 "익명 조사에서는 약 7500명이 인권침해 경험을 밝혔으며 실명을 밝힌 신고도 130여건 접수됐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날부터 신고 내용을 조사할 예정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협회로부터 14일 신고 의뢰를 받았다"며 "폭행이나 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 신고는 바로 지방 관서에 이송해 실사를 진행하는 한편 성(性) 사안은 별개로 담당 과에 내용을 공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대책을 논의한다. 다만 문제가 불거진 병원들에 대한 후속조치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품위 손상 행위를 한 의료인이 밝혀진다면 모를까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처벌 여부는 아직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움직임이 실제 조직 문화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간호사 사회 내에서부터 변화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의료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대부분 간호사들이 태움 문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바꾸려고 연대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며 "문화가 바뀌려면 외부 규제보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직 간호사 B씨는 "간호사들은 직장 내 괴롭힘 문화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길 뿐 아니라 업계가 좁다는 인식 때문에 내부 고발을 꺼린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신고 사례도 임금 미지급 등 근로기준법 위반 내용이 상당하고 태움 등 직장 내 괴롭힘과 직접 관련된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달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한 아파트 화단에서는 서울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투신 동기 등을 확인 중이다. 유족 등이 선배 간호사의 괴롭힘이 극단적 선택의 원인이라고 주장함에 따라 직장 동료 등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숨진 간호사의 소속 병원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은 없었다고 나왔다"며 "오늘(19일)부터 전수조사를 시작해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mj1@mt.co.kr, 김영상 기자 video@mt.co.kr, 방윤영 기자 by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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