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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뇌 기억 유전자는 바이러스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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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국 두 연구진 동시발견해 발표

“기억과 인지 등에 중요한 단백질

분석해보니 바이러스 껍질 구조

안에 유전물질 담아 뉴런간 수송”

진화과정서 바이러스가 남긴 흔적

사람 몸에 비슷한 유전자 100여개

우리가 몰랐던 세포소통 방식일까



한겨레

신경세포(뉴런)의 현미경 사진. 뉴런들 사이에서 기억과 인지의 뇌 기능에 중요하게 관여하는 단백질이 실은 바이러스 껍질 구조를 하고서 바이러스처럼 거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단백질은 오래전 바이러스가 남긴 유전자 흔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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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뇌의 신경세포(뉴런)들 사이에 바이러스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으스스한 얘기로 들린다. 그런데 모양이나 행동이 바이러스를 닮은 단백질이 동물 뇌에서 뇌 기능에 꼭 필요한 구실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다행히 동물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아주 오래 전 바이러스의 일부 흔적일 뿐 진짜 바이러스는 아니다.

최근 미국 유타대학의 제이슨 셰퍼드 교수 등 연구진은 쥐의 뉴런 실험에서, 그리고 또 다른 연구진인 매사추세츠대학 의대의 트래비스 톰슨 교수 등은 초파리의 뉴런 실험에서, ‘아크’(Arc)라는 단백질이 바이러스 껍질 구조를 하고서 세포들 사이에 오가며 신호물질의 운반과 전파 역할을 하는 현상을 발견해 생물학저널 <셀>에 같은 날 각각 발표했다. 동시발견이다. 연구진의 후일담도 흥미롭다. 이들은 아크 단백질의 모양을 처음 직접 관찰했을 때 “후천성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같은 모양”인 걸 보고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보도자료에서 전했다.

바이러스 속성이 처음 발견됐을 뿐이지 사실 이 단백질은 이미 뇌과학자들한테 꽤나 잘 알려져 있다. 아크 유전자를 오래 연구해온 듀크-싱가포르국립대학의 제현수 교수는 “아크 단백질은 뉴런 사이에서 기억의 전달 물질로 쓰일 만한 거의 완벽한 속성을 지녀 많은 연구자들이 학습과 기억에 아크 단백질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지 연구했고 연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그동안 연구에선 이 유전자 기능을 없앤 실험쥐는 하루 전 학습한 정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크 유전자는 장기기억과 인지 등 뇌 기능이나 뇌질환에 중요하게 관여하는 유전자 중 하나로 꼽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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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세포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아크 단백질은 후천성면역결핍 바이러스(HIV)의 단백질 껍질(캡시드)과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림은 에이치아이브이의 전체 구조와 캡시드 부분의 3차원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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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껍질에 담아 물질 수송

보통 바이러스는 자기 게놈(유전체) 정보를 단백질 껍질(캡시드)로 감싸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고서 세포에 침투하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복제 바이러스들은 다시 캡시드 구조를 갖추고서 세포 바깥으로, 다른 세포로 퍼진다. 그러면서 감염은 확산된다.

두 연구진이 각각 확인한 연구 결과를 보면, 아크 유전자에서 발현된 단백질이 바로 이런 바이러스 같은 모양과 행동을 보여준다. 아크 단백질 단위체들은 점차 뭉쳐 바이러스 껍질 구조를 이루며 그 안에 자신의 유전물질(mRNA)을 담는다. 그러고서 다른 뉴런들로 전파된다. 실제로 모양이나 행동만이 아니라 염기서열도 비슷하다. 아크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아주 오래 전 생물의 게놈에 침입해 자리를 차지한 바이러스 계열(레트로바이러스 또는 트랜스포존)의 일부 유전자 염기서열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캡시드: 자신의 게놈(유전체)을 감싸고 있는 바이러스의 단백질 껍질.

레트로바이러스: 자신의 유전물질을 아르엔에이(RNA)로 지니는 바이러스.

트랜스포존: ‘뛰어다니는 유전자’라는 별명처럼 디엔에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 있다. 주로 식물에 많지만 인간 게놈에도 많다. 아주 오래 전 외부 바이러스나 유전인자가 생물체의 유전체에 침투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화의 동력이면서도 제어되지 못할 때 질환 원인이 될 수 있다.

셰퍼드 연구진은 쥐의 뉴런을 아크 단백질 배양액에 넣어두었더니 뉴런이 아크 단백질을 흡수하며 활성을 띠었으며 다른 실험에선 아크 단백질이 뉴런들로 전파되면서 다시 더 많은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톰슨 연구진은 아크 단백질이 초파리에서는 운동뉴런에서 근육세포 쪽으로 퍼지는 특성을 관찰했다.

두 실험은 쥐와 초파리에서 이뤄졌지만, 신경과학자들은 아크 유전자가 사람 뇌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 뇌질환과 관련해 단백질 응집체의 뉴런 간 이동을 연구해온 이승재 서울대 의대 교수(신경질환실험실)는 “사람도 아크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 뉴런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3년 노벨생리의학상은 세포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세포들끼리 작은 주머니(소포)에 여러 분자를 담아 주고받는 이른바 ‘세포 간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처음 밝힌 생물학자 3명한테 돌아갔다. 이번 발견은 소포에 담겨 세포 밖으로 운반되는 여러 분자 중에 특정 단백질이 그동안 몰랐던 바이러스 같은 방식으로 뉴런 사이에서 운반과 전파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 밝혀낸 것이다.

더욱이 사람 게놈에는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 계열의 유전자가 100여개나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세포 사이에서 물질을 운반하는 바이러스성 단백질이 더 있으리라는 추정도 자연스레 나온다. 만일 다른 단백질에서, 다른 부위 세포들에서,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면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끼리 물질과 정보를 주고받는 세포 커뮤니케이션의 생물학은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바이러스 아닌, 바이러스 같은

이번 연구가 관심을 끈 이유 중 하나는 몸 안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단백질이 왜 바이러스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느냐는 물음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속성의 단백질 또는 유전자가 대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도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연구진은 바이러스성 단백질이 생물 진화 과정에서 수억 년 전 생물체의 게놈에 들어와 자리잡은 바이러스의 일부 유전자 흔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는 사람을 비롯해 동물의 게놈 안에 유전자로 자리잡아, 바이러스 속성을 이용한 생체 기능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톰슨 교수는 전자우편에서 “아크 유전자는 오래전 바이러스의 잔존물, 특히 트랜스포존의 잔존물일 가능성이 꽤 있다”며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유전자인) 트랜스포존은 인간 몸에도 아주 오랜 기간 존재해왔는데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트랜스포존의 남아 있는 조각들이 아크 유전자 같은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셰퍼드 교수도 비슷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연구진은 아크 유전자의 유래와 관련해 대략 3억5천만~4억년 전에 레트로바이러스의 먼 조상인 트랜스포존의 유전물질이 동물의 디엔에이에 삽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초파리에는 다른 시기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본다면, 뇌의 장기기억과 인지 기능은 바이러스 유전자의 흔적을 신호물질의 운반 도구로 활용하고 그 도움을 받으며 진화해왔다는 해석도 가능한 셈이다.

발견 이후에 풀어야 할 물음은 여전히 많다. 이승재 교수는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테고 여러 생리 시스템에서 비슷한 현상이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머잖아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인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이런 방식이 뉴런 간 커뮤니케이션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하는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뉴런 간에 일어나는지 등이 더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톰슨 교수는 “단백질 껍질에 자기 유전물질 외에 다른 분자도 담아 운반하는지 등을 더 확인하는 게 지금의 연구 과제”라고 전했다. 셰퍼드 교수는 “아크 단백질이 기억과 인지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비슷한 다른 단백질이 더 있는지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바이러스 껍질 단백질은 유전물질이나 약물을 세포 안으로 안전하게 나르는 운반 수단으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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