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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더,오래 웹소설] (9)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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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일러스트 김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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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1월 말이면 근처 대로에 큰 조명이 설치된다. 금융위기라 우울함이 있었지만, 야간조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화점도 그렇고 주변의 몰은 그다지 사정이 좋지 않았다. 불황의 끝이 어디일지를 모른 채 '세일'이라고 쓴 글자만 외롭게 보였다. 버블의 아픔은 그렇게 보통사람들의 아픔에 먼저 다가온다. 부모님과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에고, 경제가 어려워도 산타클로스가 아이들한테 선물을 잔뜩 싣고 와 주길 바란다. 너 크리스마스트리의 경제학에 대해서 아니?”

아버지는 내게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셨다.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나는 단순하게 답변한다. 경기를 감안한 일반론이다.

“음. 뭐. 그건 쉬운 질문 아닌가요. 경기가 안 좋으니 트리도 안 살 것이고 전기도 많이 안 사용하려고 하겠죠.”

아버지는 "맞다"고 했다. 그런데 내게 경제학은 미래 예측력까지 생각해야 한다며 100점의 점수를 전혀 줄 수 없다고 했다. 마치 당신이 그런 쉬운 질문을 했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마 10년 뒤에 크리스마스트리가 귀할 거야. 너 경제학에서 거미집 이론 공부했잖아. 농산물이란 것이 풍년이 되면 가격이 하락하지. 그다음 해에 사람들은 농사를 안 지어 가격이 오히려 상승한다는 것. 그것을 경제학 그래프로 그리면 거미집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였지.”

「 용어사전 > 거미집이론(cobweb theorem)

가격변동에 대해 수요와 공급이 시간차를 가지고 대응하는 과정을 구명한 이론. 가격과 공급량의 주기적 변동을 설명하는 이 이론은 1934년 미국의 계량학자 W.레온티예프 등에 의해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정식화되었으며, 가격과 공급량을 나타내는 점을 이은 눈금이 거미집 같다고 하여 거미집 이론이라고 한다.



“아. 그럼 나무를 키우는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만약 금융위기가 극복되거나 경기가 호전되는 무렵에는 진짜 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가 귀하게 된다는 건가요.”

아버지의 말씀은 정확히 맞았다. 훗날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크리스마스트리 판매업소에서 파는 트리 물량은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트리가 부족하면 거래처가 아닌 다른 농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나무를 구할 수가 없었다.

“10년 뒤쯤에 크리스마스트리 품귀 현상은 미국 전역에서 발생할 거야. 가격도 50%까지 오를 수 있어.”

금융위기로 경기가 침체하면서 트리 판매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당수 트리 재배 농가들이 재배를 포기했다. 트리가 팔리지 않으니까 나무들을 갈아엎거나 산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나무를 기르기까지 10년 정도가 걸린다. 아버지의 앞날을 헤아리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아버지, 그럼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했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어떻게 믿으세요.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건가요.”

“음.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건 트리 예측과는 다른 것 아니겠니.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 트리를 찾는 사람들은 많이 늘어날 것이고 트리 공급은 수요에 미치지 못하니 가격이 상승하지. 그런데 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위기 예측이라. 그건 쉽게 가늠이 안 되는 것이야. 물론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예측하여 주식을 공매도(쇼트 셀링)하거나 디폴트 관련 파생상품에 베팅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런 파장을 주는 블랙스완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 아니겠니. 너는 주식을 어떻게 예측하니. 믿었던 회사인데 망하는 경우도 있잖아. 인간의 예측 범위는 항상 한계가 있는 거지.”

내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2020년을 대비해서 나는 트리 장사를 해야겠네. 가엾은 저 루돌프. 훗날 나무 가격 상승 때문에 사라지지는 말지어다. 징글벨, 징글벨.”

금융위기는 국내외 기업에도 심한 타격을 주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스페인어 신문에는 금융위기로 남미 경기가 안 좋다는 상황이 전해졌다. 브라질의 경우 연말특수가 실종될 정도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경기를 보면 10월부터 판매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점점 매상이 오르다가, 12월부터 크리스마스 대목 때까지 폭발적인 증가가 있어야 정상이다. 지방소매상들의 판매 부진은 도매판매수요를 줄였다. 예년에 미치지 못하는 판매량과 판매금액은 상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국 역시 높은 실업률, 국민소득의 하락, 자동차 3사의 파산위기와 같은 산업생산의 감소로 경제가 위축되었다. 미 금융당국이 금융회사들을 살리기로 결정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가중되는 분위기다.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의 위기’에 있었다. 몇몇 기업을 살리는 것으로 시장 시스템을 구해내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 나오고 있었다. 금융자본주의의 축인 ‘자유시장’과 그 뒷받침이 됐던 ‘미국’ 자체가 불신의 대상이 된 상황이다. ‘시장 책임론’에서 ‘대마불사론’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미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구제금융은 시장의 혼란을 부추겼다. 미국 정부에 시장을 살릴 자금이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각 방송은 2008년 회계연도 재정적자 수치를 거론하며 재원이 있는지를 지적했다.

“에고. 가난한 사람들이 진짜 걱정이다. 굿스푼에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 미국 내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힘겹게 사는 도시 빈민들 말이야.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어 거리를 헤매는 홈리스들과 노동시장을 전전하는 일일 노동자들이 정말 불쌍하지.”

내 어머니 수잔은 ‘굿스푼’이란 모임에서 봉사를 정기적으로 하신다. 벌써 10년째이다. 중남미 출신 불법체류자를 비롯하여 미국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 급식 행사에 참석하여 일을 도와주신다. 사실 이는 한국계 선교단체다. 어머니의 뿌리가 한국이지만 어머니는 한국말을 전혀 못 하신다.

“어머니. 감사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참 아름다운 삶을 사는 거예요. 내가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이유고요. 아름다움을 가슴 속에 모아서 산다면 사람들이 정말 성숙해진다는 걸 어머니는 직접 제게 가르쳐 주시고 계세요.”

그날. 나는 릭에게서 크리스마스 카드 한장을 받았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네게 비트코인을 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좀 더 정교한 암호화 작업이 필요하더라. 내년 1월 네 생일날 선물로 큰 파티를 열까 해. 그때 보자.”

그가 내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이 무척 이상했다. 누구일까? 그 생일 달을 가르쳐 준 인물은. 그 순간 한명의 얼굴이 생각났다. 린다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배신 받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데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린다는 내게 항상 생일 선물을 주었다. 나 역시 생일 선물을 린다에게 주었다. 린다의 생일은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린다는 릭에게 아마 둘러대며 내 생일날을 알게 된 이야기를 했으리라. 여하간 그가 말한 비트코인 선물은 내게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나는 기쁜 마음에 릭에게 전화를 건다.

“릭, 카드 잘 받았어. 내 생일이 1월인 것은 어떻게 알았니.”

“응. 네게 물을까 했는데 린다가 알려주더라. 톰에게 물어봤다면서. 이상하게 린다가 너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꺼리더라. 우린 다 동창이고 뭐 그런 것 아냐. 린다가 수줍음을 타기는 하지. 우리 집에서 성대한 네 생일 파티를 할 것이니 단단히 기대하거라. 그리고 선물이 있어. 비트코인의 최소 단위는 네 이름 사토시야. 코인의 가치를 생각해서 최소 단위를 아주 낮게 잡았어. 혹시 아니? 잭폿이 터질지. 어차피 우리는 우리만의 가상의 세계를 열어 가는 것이고. 설사 이 프로젝트에 사람들의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해도 나 릭, 린다, 빌의 이름은 영원한 거야. 그래서 생일날 축배를 들자고.”

릭의 배려에 대해 감사했다. 어머니는 릭의 어머니를 위로 할 겸 손수 음식을 해서 릭의 어머니를 찾아뵙고 오셨다.

“겨울이 오는데 많은 사람이 집을 잃고 헤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차압당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이 크리스마스가 악몽 같겠구나. 릭의 어머니는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어. 빚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말하더라. 모기지가 죽음 같은 약속이라며 나보고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미국의 중산층은 무너지고 있다. 빌. 너보다 어려운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못 할까 걱정이다. 너는 전혀 문제없는 거니?”

나는 어머니에게 내 통장의 계좌 일부를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상당히 놀라시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아니. 월가가 망한 게 아니었니. 너 어떻게 이 많은 돈을 모았어.”

“어머니, 어머니의 착한 아들은 엄청 구두쇠랍니다. 5년 동안 열심히 벌었고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성과급도 많이 받았어요. 이 돈 좋은 데 쓸게요. 어머니 노후는 내가 책임질게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저녁을 하러 가신다. 눈이 왔다. 나는 양초에 불을 지피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튼다.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리며 내 마음을 진정시킨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맛본다. 홈 스위트 홈을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외친다.

“빌, 사랑하는 아들. 식사 준비 다 되었다. 어서 오렴. 아버지가 기다리셔.”

크리스마스 밤은 깊어 갔다. 아니타와 보낸 크리스마스 밤이 생각났다. 절정의 순간에 그녀는 항상 말했다.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나를 끝까지 사랑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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