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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배우 이주화의 유럽스케치(56)]우리를 지켜주세요-그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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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오스트리아의 첫 기착지는 그라츠.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달려 3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한다. 그라츠는 슬라브어로 ‘작은 요새’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의 빈과 짤츠부르크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라츠는 우리에게 조금 낯설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 그라츠는 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중부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그라츠의 구시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이다. 구시가에는 도시의 상징인 시계탑과 대성당, 무어강의 인공섬 등이 있고 중앙역 뒤쪽으로는 에겐베르크 성이 있다. 보디빌더에서 시작해 영화배우로 성공한 뒤 정치가로 변신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한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고향이 그라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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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앙역이 정면으로 보이는 숙소에 오후 늦게 여장을 풀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출발해 슬로베니아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들어온 긴 여정이었다. 중앙역에서 구시가까지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오랜 운전의 여독도 풀 겸 천천히 걸으며 야경을 즐겼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거리 곳곳은 사람들로 붐빈다. 딸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고 강아지를 보자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현했다(가끔 강아지가 아닌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이의 눈길이 가는 곳은 늘 강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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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볼프강이라고 소개한 50대 초반의 남성은 딸아이가 자신의 강아지에게 손을 흔들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이 강아지의 이름은 리나야. 나이는 16살. 사람나이로 치면 백 살은 되었지”라고 딸아이에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만져도 좋다고, 괜찮다고 한다. 강아지용 간식으로 가져온 양고기도 손에 쥐어준다.

그에게 딸아이 영어 이름이 “아이린(Irene)”이라고 하자, 자신의 조카 이름과 같다며 더 좋아했다. 우리를 향해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핵무기를 개발한 북한 이야기를 꺼낸다. 극동아시아 지역 뉴스에 관심이 많은지, 최근 벌어진 미사일 발사내용까지 언급한다. 딸아이와 강아지 리나 때문에 길거리 토크를 시작하게 된 우리는 “빨리 한국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헤어졌다. 그라츠의 구시가는 그리 크지 않아, 저녁 산책으로 충분히 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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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우리는 먼저 중앙역에서 서쪽에 위치한 에겐베르크 궁전에 들렸다가 구시가 구경을 하기로 했다. 자동차 여행을 하면 대중교통을 탈 경우가 적은데, 이번에는 숙소 바로 앞에서 정거장이 있는 트램을 타기로 결정한다. 지상으로 움직이는 트램을 타면 차창 밖 그라츠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호텔 직원에게 궁전으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트램 타는 방법과 티켓 구입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노부부인 피터 내외가 “우리도 트램을 타야 하니 같이 가자. 티켓을 사는 법도 알려주겠다”고 한다. 연세가 지긋해 걸음이 느린 그들과 발을 맞춰 역으로 향했다.

피터는 중앙역에 있는 트램 발권기에서 먼저 자신들의 티켓을 구입했다(우리에게 어떻게 하는지 시범을 보인거다). 이어 우리 가족의 일일권 구입까지 도와주었다. 감사한 마음에 구시가 쪽으로 트램을 타고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은퇴한 노부부가 함께 여행 다니는 모습을 유럽과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나이 지긋한 그들은 기차나 자동차 여행을 하고 캠핑차량으로 대륙을 돌아다닌다. 젊은 사람들의 여행과 달리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느긋하게 다니는 모습이 평화롭고 여유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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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부부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건너편으로 넘어가 에겐베르크행 트램을 탄다. 창가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대여섯 정거장을 가니 벌써 도착이다. 이 궁전에는 딸아이를 위한 작은 선물이 숨겨져 있다. 입구에서 티켓을 구입하니, 매표소 직원이 “오늘 끝날 때까지 언제든지 들어오고 나가도 된다”며 친절하게 설명한다.

넓은 정원을 지나 궁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정갈하다. 조개로 장식한 특이한 분수가 눈에 띈다. 궁내부를 본 뒤에 다시 밖으로 향한다. 넓게 펼쳐진 정원에서 딸아이가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곧 아이의 큰 소리가 들린다. ‘이제 발견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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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엄마, 여기 큰 새가 있어요. 공작새에요” 에겐베르크 궁의 정원에는 특이하게도 공작이 살고 있다. 나는 미리 이곳을 검색하며 알고 있었다. 딸아이가 공작을 살금살금 좇아간다. 새의 걸음걸이를 똑같이 흉내 낸다. 다른 사람들도 공작이 신기한 듯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정원 곳곳에 공작새가 풀어져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구웩~ 구웩~” 하는 공작의 큰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정원에서 공작을 힘들게 하거나 만지려는 사람은 없었다. 움직이는 길을 막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공작의 무리를 한참 구경한 우리는 에겐베르크 궁전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런데 궁전 밖으로 나오니, 그 입구에 공작 한 마리가 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딸아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공작이 날개를 흔들어 보인다. 따라오라는 것처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고 우리뿐이다. 공작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따라가 본다. 그러자 작고 예쁜 연못이 나온다. 궁전 뒤쪽에 위치해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곳이다. 공작은 그곳에서 물을 먹은 뒤에 우리를 향해 입을 뻐끔거린다. 마치 말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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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을 계속 따라갔다. 이번엔 어떤 나무 앞에 선다. 나무 표피에 사람들이 깊게 파 놓은 글자들이 보인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와 딸아이는 그 나무를 어루만져 주고 꼬옥 안아주었다. 공작새는 알려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우리를 너무 많이는 아프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본다.

“아프게 하지 말고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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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주화는 지난 1년간 잠시 무대를 떠나 유럽을 비롯해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추억의 잔고를 가득채워 돌아온 뒤 최근 <인생통장 여행으로 채우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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