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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논설위원이 간다] "애국심보단 도전·연봉 더 중요"…KAIST 인재에 세계가 눈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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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 랩에서 4차 산업 핵심 연구

실력 쟁쟁, 외국 기업서 입도선매

"정현·손흥민처럼 세계무대서 싸워야”

2030 과학도들 붙잡기 어려워

국내 연구 환경·처우 개선하고

인재 육성·유출 대책 서둘러야

양영유의 현장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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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대학원생들이 빅데이터와 AI에 사용되는 고속 디지털 신호를 측정,분석하고 있다. [사진 K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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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두뇌'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애플·구글·엔비디아 등 유력 회사들이 선봉에 서고,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10년짜리 장기비자를 하루 만에 발급해주며 인재를 빨아들인다. 일본도 1년 만에 영주권을 주는 당근책으로 2020년까지 인재 1만 명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클라우드 컴퓨팅·블록체인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두뇌’를 확보하지 못하면 새 산업생태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인재는 육성·수성·유치 모두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과학 인재의 산실인 KAIST(한국과학기술원)를 찾아가 그 속살을 들여다봤다.

대전시 유성구 대학로에 있는 KAIST는 조용했다. 정문을 지나 캠퍼스를 걸으며 만난 건 근로자들과 연못의 거위뿐. KAIST의 상징인 ‘거침없는 도전’에 나선 과학도는 물론 그 흔한 현수막 하나 볼 수 없어 캠퍼스가 잠을 자는 듯했다. 그런 착각은 잠시, 지난 12일 둘러본 랩(LAB)은 딴 세상이었다. 연구 과제와 성과, 프로젝트를 설명한 영어 보드가 즐비했고 싱싱한 젊음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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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교수실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실리콘 반도체 공정 클린룸에서 실험하는 모습. [사진 K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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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종합기술원 1층에 있는 김정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의 ‘테라바이트 랩’. 26명의 대학원생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무어의 법칙’ 종말을 선언하고 세계 최초로 3차원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적층(積層)기술을 연구하는 현장이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창업주 고든 무어가 50년 전 실리콘 칩 하나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수가 2년마다 2배씩 늘어날 것이라고 주창한 2차원 반도체 개념. 2010년대 초반까지 반도체 설계의 바이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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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및 전자공학부 김준모 교수가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컴퓨터로 구현하고 있다. [사진 K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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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로 선폭 미세화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혔고, 반도체 웨이퍼를 수직으로 층층이 쌓는 3차원 반도체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 기술을 적용한 반도체 메모리 제품이 HBM인데, 빅데이터를 AI로 처리하기 위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모듈이 되고 있다. 김 교수는 “구글 검색기에 걸리는 주제는 이미 철 지난 죽은 연구다. 연구는 선도적(first)이고 독창적(only)이고 최상(best)이어야 한다”며 '무어의 법칙'을 대체할 '김의 법칙(Kim’s Law)'을 주창했다. “2년마다 수직으로 적층되는 반도체 수가 2배씩 증가할 것”이라는 게 핵심이다. 박사과정 학생들의 토론이 흥미진진하다.

최수민: AI 계산용 '3차원 메모리 HBM 시스템 프로젝트' 설계도를 분석해보자.

박준용: 시뮬레이션 결과 예상 못 한 '전원 잡음'이 발생했다.

최수민: 어느 곳에서 발생하나.

박준용: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의 입·출력 연결 회로다.

조경준: 신호선이 1000개나 되고 너무 붙어 있어 그런 것 같다.

김혜수: 맞다. 신호선 간격이 마이크로미터(㎛)까지 줄어들었다.

정승택: 분석이 타당한지 측정해보자.

이들은 2층 고속 측정실로 올라가 실험을 했다. 열정적인 협연(協硏)을 보니 곧 난제를 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5분 거리인 IT융합빌딩 김준모 교수실 랩. 33명의 대학원생이 AI 전문가의 꿈을 키우는 곳이다. 시각정보를 이용해 핸들을 조작하는 자율주행 자동차용 AI를 연구하는 박사과정 이예강(29)씨의 책상에는 커피잔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이씨는 “KAIST 학생들은 24시간 연구 벌레라는 말은 요즘 맞지 않는다”며 "아침형·올빼미형 등 각자 개성이 다르다"고 말했다. 임준호(30)씨는 AI가 AI를 과외하는 심화학습, 성시현(31)씨는 AI 경영컨설팅 프로그램에 푹 빠져 있다. 김준모 교수는 “자유롭게 연구하니까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와 실력이 쟁쟁하다"고 밝혔다.

KAIST에는 650여 명의 교수가 각각 랩을 운영하며 인재를 키운다. AI 분야 60여 개를 비롯해 정보통신기술(ICT) 등 4차 산업 관련 핵심 랩만 150여 개에 이른다. 송준화 전산학과 교수는 “IoT와 증강현실(AR), 모바일을 중심으로 연구하는데 해외에서 러브콜이 이어진다"고 했다. 송 교수가 키운 박사 10명 중 7명은 미국·영국·싱가포르의 기업·대학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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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학생들은 연구시간이 자유롭다. 올빼미형 연구원의 책상에 수북이 놓여 있는 커피잔. 양영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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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교수 연구실의 최수민씨도 오는 8월 세계 최대의 GPU 회사인 실리콘밸리 엔비디아에 입사한다. 지난해 6개월간 현지 인턴을 한 최씨는 “최고경영자 젠슨 황이 자신의 집에 초대해 침실까지 공개하며 마음을 사로잡았다”며 “세계 각국 인턴 200명 중 3분의 1을 연봉 15만 달러에 채용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취업비자가 아닌 'O-1' 비자를 받는다. 미국 정부가 과학·예술·스포츠 등 특수 분야의 인재에게만 내주는 '슈퍼 인재 스카우트 비자'다. 김 교수 랩에서만 최근 10년간 24명이 실리콘밸리의 애플·인텔·엔비디아·구글 등에 입사했다. 별도의 스톡옵션을 받고 입도선매 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두뇌 유출(Brain drain)인가, 새로운 도전의 기회인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17 세계 인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고급두뇌 유출지수는 63개국 중 54위, 고급인력 유인지수는 48위에 그쳤다. '토종' 인재의 엑소더스가 심각하지만, 해외 인재는 유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과학도들의 생각이 궁금해 KAIST 석·박사생 48명에게 물었다. 해외 취업과 국내 잔류가 16명씩으로 팽팽했다. 고민 중인 학생들도 여건이 허락되면 해외 진출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종합해보니 60%는 해외 진출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글로벌 무대에서 실력을 쌓을 수 있고, 연구 환경이 자유롭고, 연봉이 두둑한 게 그 이유로 꼽혔다. 반면 국내에 남겠다는 학생의 90%는 가족 문제 때문이지 국가 봉사 명분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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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학과 연구실 복도에 붙어 있는 보드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다. [사진 K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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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KAIST 학생들의 일부 의견이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뚜렷해 보인다. 미국 IBM 입사가 확정된 유충국(30)씨는 "외국 기업은 연구에 제한을 두지 않아 마음껏 창조적 파괴를 시도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성시현씨는 "과학도는 프로선수와 같다. 정현이나 손흥민처럼 세계무대에서 겨뤄야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KAIST 신성철 총장은 후배들의 가치관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기성세대가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애국심으로 일했다고 2030 세대에게 그런 걸 강요해서는 안 된다”며 “글로벌 기업 진출은 단기적으론 국가에 손해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론 네트워크 구축과 고급 인재 확보에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 환경 개선과 능력별 파격 대우, 스타트업 활성화 대책을 세워 인재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KAIST 입학생의 70%는 과학·영재고 출신으로 이들 중 60% 이상은 대학원에 진학한다. 1971년 개교 이후 1만1731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하지만 해외로 떠난 인재 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을 맞았는데 핵심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김정호 교수는 "AI 국내 고급 인력은 1000여 명, 종사자는 수천 명에 불과하다"며 "미국은 85만 명, 인도는 15만 명이 AI 분야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기업이 글로벌 두뇌 전쟁에 적극 대처하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KAIST 본관 앞 잔디광장에 서 있는 장영실 동상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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