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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쉿! 우리동네] 고층 아파트가 삼켜버린 '복사골' 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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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복숭아 개량 재배가 시초…1960년대 1년 생산량 2천t

인구 급증해 중동신도시 건설…복숭아밭 아파트단지로 변모

연합뉴스

1970년대 경인고속도 옆 복숭아 좌판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부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서울은 막무가내로 그들을 밀어내었다. 온갖 책략을 동원해서 그들을 쫓아낸 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음흉한 작별을 고했다. 달리는 트럭의 짐칸에 실려서 그는 부천시의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서울 옆 부천을 배경으로 한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1980년대 압축 성장 과정에서 남루하고 비루해진 소시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설 속 부천은 서울에서 밀려난 주변인들이 화려한 경제개발의 그늘에서 설욕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좌절하는 공간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부천은 서울에서 밀려난 이들이 모여들며 차츰 도시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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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소사 복숭아로 통조림 만드는 여성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부천은 소비 중심지인 서울과 물류 중심지인 인천 사이에 있는 영향으로 경인고속도로와 경인 국철(서울지하철) 1호선이 다녔다. 편리한 교통에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있어 사람들이 계속 몰렸다.

1970∼1980년대 부천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5%를 넘었다. 같은 시기 3%대인 서울과 다른 수도권 지역의 5배를 웃도는 수치였다. 이 시기 급격히 팽창한 경기도 전체의 평균 인구증가율도 7%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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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부천(사진 왼쪽)과 1990년대 부천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1986년 부천시 인구가 50만명을 넘어서며 계획인구보다 14만명을 초과했다. 2년 뒤에는 60만명에 육박했다.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도시 규모가 작았다. 1990년부터 5년간 정부 주도로 17만명을 수용하는 부천 중동신도시 건설 사업이 시작된 이유다.

정식 명칭은 '부천 중동지구 택지개발 사업'이다. 이 사업으로 논과 밭에 고층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3년 7월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될 당시 6만5천여명이던 인구는 올해 들어서 87만명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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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경인고속도 인근에서 판매된 소사복숭아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부천시로 승격된 초기인 1970년대 경인고속도로 주변 부천 지역은 온통 복숭아나무밭이었다. 고속도로 주변에 복숭아를 파는 좌판이 길게 늘어서 장관을 이룰 정도였다.

지금의 경인전철 중동역·송내역 일대와 성주산 자락이 모두 복숭아 과수원이었다.

복숭아는 장수의 상징으로 꼽히는 과일이다. 중국 명나라대 장편소설인 '서유기'에서 주인공 손오공은 '불로불사'한다며 9천 년 만에 익는 천도(복숭아)를 모두 따먹었다.

한서(漢書) 동방삭 열전에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불사(不死)의 여왕 서왕모의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동방삭이 삼천갑자년(18만년)을 살았다고 한다.

1970년대 부천 복숭아는 대구 사과, 나주 배와 함께 3대 과일 명물로 손꼽히며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다.

마을 전체가 복숭아 향으로 가득한 수확 철이 되면 서리꾼도 극성을 부렸다. 솎아내기와 봉투 씌우기 작업을 할 때는 온 동네 부녀들이 모두 복숭아나무에 매달렸다.

'복사골 부천'이라는 이름도 복사꽃(복숭아나무꽃)이 많이 피는 고을이라는 이유로 붙은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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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복사꽃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부천에서 개량된 복숭아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한 때는 1902년으로 알려졌다. 소사농원이 부천 복숭아의 시초이자 한국 복숭아 재배의 시작이었다.

복숭아나무는 배수가 잘되는 남향의 완경사지가 재배지로 최적이다. 연평균 기온이 섭씨 11∼15도인 지역에서 잘 자라고, 최적의 생육 조건은 섭씨 20∼30도의 온난 기후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복숭아를 재배하는데 최적의 요건을 갖춘 곳이 부천이었다.

1925년부터는 재배 면적이 늘면서 소사 복숭아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광복 후 1960년대에는 부천의 복숭아 재배 면적이 180여만㎡에 달했다. 한 해 생산량도 2천t을 넘었다. 이 시기 초등학교 사회생활 교과서에는 '소사 복숭아'가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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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 복숭아를 소개한 1960년대 초등학교 사회생활 교과서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그러나 부천이 본격적으로 도시로 개발되면서 복숭아 과수원은 거의 사라졌다. 중동신도시로 대표되는 개발사업이 복사골을 집어삼켰다.

이는 부천을 사이에 두고 서울 구로와 인천을 연결하는 수도권 전철 1호선 역사 변천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천이 복숭아로 명성을 한창 구가하던 시절, 부천을 관통하는 역은 역곡-부천-송내역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 부천과 송내 사이에는 중동역이 생기고, 1997년에는 역곡과 부천 사이에 소사역이 들어섰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역곡과 송내 구간 선로 양편은 온통 복숭아밭이었다.

하지만 이젠 부천 어디에서도 소사 복숭아의 풍요로웠던 옛 명성은 찾을 수 없다.

현재 부천 전체 복숭아 재배 면적은 9만5천㎡이다. 50여 년전보다 20분의 1로 줄었다.

27가구가 소사본동·대장동·춘의동·오정동·괴안동·범박동 등지에서 복숭아를 재배하며 한 해 87t가량을 수확할 뿐이다.

도시화와 함께 부천 복숭아의 명성은 빛을 잃었지만, 향수를 달래며 명맥을 이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부천시가 복사골 이미지 살리기에 나서면서 복숭아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부천시의 시목·시화·시과는 모두 복숭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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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복숭아 [부천시 제공=연합뉴스]



복사꽃이 피는 4월 춘덕산에서 복숭아꽃 축제를, 5월에는 복사골 예술제를, 9월에는 성주산 복숭아축제가 열린다.

부천시 관계자는 "현재는 과거보다 부천에서 복숭아 재배 면적이 확연히 줄었다"면서도 "도시화 과정에서 복숭아나무밭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명맥을 잇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s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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