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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섹시하기 위해 태어난 누나 - 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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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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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에 섹시하다는 말은 분명히 칭찬이다. 예전에는 외모에서 풍기는 성적인 매력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태도는 물론이고 재능까지 섹시함의 범주에 포함된다.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그 반증이다. 매력이 곧 능력인 스타의 경우 섹시함은 그 어떤 표현보다 더 좋은 칭찬이다. 오늘은 나에게 섹시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려준 존재에 대해 쓰려고 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각의 고삐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그 이름. 오늘 칼럼의 주인공은 김완선이다.

무성의 존재에서 남성으로 성장하는 첫걸음을 뗄 무렵,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 티브이에서 그를 처음 봤다. 당시 기준으로는 무섭다는 묘사가 가장 적당했을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전에는 본 적조차 없는 화려한 춤을 추는 그의 모습에 소년은 탄식을 내뱉었다. 왜 탄식이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시절 소년이 여자에 대해 알고 있던 칭찬들, 이를 테면 예쁘다, 귀엽다, 아름답다 등등의 표현은 쓸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으니까. 소년이 섹시함에 눈뜬 최초의 순간이었다.

김완선이 등장할 즈음의 연예계에 대해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물적 토대의 변화가 나머지 모든 것의 변화를 이끈다는 유물론적 관점은 이 시절 연예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유효하다. 1980년부터 컬러티브이 시대가 시작되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이 유례없이 높아졌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이른바 ‘3에스(S)' 분야를 적극적으로 양성한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 정치적으로는 엄혹했지만 그 반작용으로 연예계에는 섹시함이 전면에 나섰던 시절, 바로 그때 김완선이 데뷔한 것이다.

김완선은 겨우 10대 초반의 나이에 친이모이자 가수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한백희에게 발탁되어 혹독한 조련을 받는다. 인순이의 백댄서팀인 리듬터치에 합류한 뒤 무대 경험을 쌓았다는 정도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각종 춤은 물론이고 발레와 기계체조까지 배우고 화성학과 오케스트라 편곡 수업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년간 학교 공부를 했다면 서울대는 두 번을 가고도 남았을 거다.

만 17살이 되던 1986년에 그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데뷔 음반은 산울림의 멤버 김창훈이 전곡을 작사·작곡했다. 그 유명한 ‘오늘밤’을 타이틀로 한 데뷔 음반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오늘밤’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다. 요즘 스타일로 편곡을 하면 얼마든지 클럽에서도 틀 수 있다. 거기에 강렬한 외모와 화려한 춤이 받쳐주면서 17살 김완선은 단숨에 가요계의 중심에 선다. 가창력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뭣이 중헌디.

그 이후 매년 새 음반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나간다. 그의 노래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2집 수록곡 ‘리듬 속의 그 춤을’은 신중현이 작사·작곡했고, 3집은 그룹 ‘사랑과 평화’ 이장희가 맡았다. 이쯤 되면 의문점이 든다. 우리는 분명히 댄스 가수로서 그를 알아왔는데 실상 그의 음악을 함께 만들어낸 사람들은 모두 우리 록음악 역사의 굵직한 인물들이다. 이후에도 그녀는 록그룹 편성의 백밴드와 주로 무대에 섰다. 윤상, 하광훈, 손무현 등등 최고의 뮤지션들과도 협업해 멋진 결과물들을 내놓았다. 실상 그의 음악적 영역은 재즈와 솔(soul) 정도를 제외한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장르적인 오해보다 더 큰 오해는 그녀가 옛날 인기를 업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는 ‘추억의 스타’라는 시선이다. 김완선은 꾸준히 가수로서의 활동을 이어왔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21세기 들어 그녀가 발표한 노래들도 대단하다. 프렌치 일렉트로닉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츠 유’, ‘오즈 온 더 문’ 등을 강추한다.

그는 지난주에 필자가 연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라이브를 들려주었다. 나는 콘솔 앞에, 그는 스튜디오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른하게 번지는 겨울 오후의 햇살 속에서 원고를 읽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갔다. 티브이가 아닌 라디오 프로그램이었기에 방송용 메이크업도 화려한 의상도 없는 일상의 모습으로 그는 호흡하고 있었는데도 곁에는 묘한 자기장이 감돌았다. 30년 전, 소년이 티브이에서 그의 화려한 춤을 보면서 느꼈던 바로 그 힘이었다. 감각의 고삐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섹시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도 있다는 사실을. 아마 그 역시 자신의 힘에 대해 아는 것 같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했던 이런 말을 한 걸 보면.

“사람이 야해서 무슨 옷을 입어도 야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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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앞으로도 계속 야해주세요.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우니까 리듬 속에 춤을 춰주세요.

이재익 S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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