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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江南人流]“한국에 매장 하나 없는데 동대문에 짝퉁이 쫙 깔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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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SFDF 수상한 표지영

“보통 여자가 좋아하는 옷 만들고파”

런던 런웨이에도 일반인 모델 세워

중앙일보

브랜드를 전개하고 있는 디자이너 표지영. 삼성패션디자인펀드 수상을 기념해 서울 한남동 비이커 매장에 컬렉션 일부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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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패션은 실험적이다. 그 어떤 패션 도시보다 관습에 탈피한 도전과 상업성에 대한 반기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하지만 요즘 런던에서 주목받는 신진 디자이너 표지영(35)은 예외다. 그의 브랜드 '레지나표'는 '보통의 여성복'을 추구한다. 주위의 평범한 여자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평범의 철학'이 먹히고 있다. 2017년 영국 보그가 꼽은 올해의 신진 브랜드로 뽑힌 데다 2017년 12월에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상자로 선정됐다. 현재 니만마커스·하비니콜스·네타포르테 등 120여 개 온·오프 매장에서 레지나표가 팔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15일 서울에서 만난 그는 "보통이야말로 남다른 나의 색깔"이라고 했다. 글=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woo.sangjo@joongang.co.kr

레지나표는 2017년 9월 런던패션위크에서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14년 브랜드 론칭 이후 전시회 형식으로만 매 시즌 컬렉션을 소개해 오다 첫선을 보이는 캣워크 무대였다. 뭔가 특별한 걸 보여주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했을 법도 한데 정작 런웨이에는 키도 나이도 평범한 스물다섯 명의 일반인 여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셜네트워크에서 모집한, 당연히 워킹 연습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Q : 깜짝 패션쇼로 기획했나.

A :
"전혀. 쇼의 컨셉트에 맞아서 시도했을 뿐이다. 사진가 니콜라스 닉슨의 대표작 '브라운 시스터스(The Brown Sisters)'에서 컬렉션의 영감을 얻었다. 사진가의 아내와 그 자매들 넷을 28년간 일 년에 한 번씩 촬영한 작품이다. 거기에는 우리 언니, 엄마, 그리고 내가 있다. 여성의 삶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주변엔 온통 이런 사람들인데 어떻게 열여덟 살짜리 말라깽이 모델만 쓸 수 있겠나. 컬렉션의 주제를 알 만한 이들이 전문 모델보다 낫다고 여겼다. 그게 레지나표에 맞기도하고."



Q : '레지나표'에 맞는다는 게 뭔가.

A :
"무심한 듯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이랄까. 아무리 성별 구분없는 젠더리스가 대세라 해도 여자를 남자처럼, 이런 건 안 맞는다. 런던 하면 떠올리는 펑키한 스트리트 무드도 아니다. 셀레브리티가 입는 화려한 의상보다 내 친구들이 멋지다고 말해주는 디자인이 좋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이기도 해야 한다. 실제로도 지난번 쇼 끝나고 일반인 모델들한테 옷을 줄까, 모델료를 줄까 물어보니 모두 옷을 갖겠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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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추구하는 레지나표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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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런 색깔을 정하게 된 계기가 있나.

A :
"나랑 가장 가까운 여자,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의상실을 했던 어머니는 늘 독립적으로 일하면서도 멋스러웠다. 어머니를 보며 그런 여자들이 입을 만한 옷을 만들어야지, 했던 것 같다. 피는 못 속인다고 어릴 적부터 재봉틀도 써 보고 남는 천으로 드레스도 만들었다. 미대(홍익대 섬유미술과)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내 대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브랜드는 왜 이렇게 해외 컬렉션만 베끼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패턴 선생님(모델리스트)과 '우리 이런 옷 만들어 볼까'라며 몇 번 수다를 떨다 희열을 느꼈다. 2007년 영국 패션스쿨 센트럴세인트마틴스로 유학을 떠난 이유다."



Q : 막상 가보니 어땠나.

A :
"다시 생각해 봐도 학교가 딱히 가르쳐 준 건 없다. 다만 내 것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학교는 '내 색깔은 이런 거야'라고 먼저 표현해야 그걸 잘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식이었다. 워낙 영어도 짧고, 발표도 적극적으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뭔가 표현한다는 자체가 참 힘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취업 비자가 없으면 졸업 뒤 한국으로 가야 하니까. 세계적으로 저명한 루이즈 윌슨(1962~2014) 교수님께 배운 게 큰 힘이 됐다. 정말 큰 행운이기도 했고."



Q : 어떤 분이셨길래.

A :
"트렌드가 이거야, 라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대신 네가 잘하는걸 열심히 하라고, 그러면 어디든 너를 위한 자리가 있을 거라고 했다. 솔직히 그때는 마음에 닿지 않았는데 이후 선택의 갈림길이 있을 때마다 그 말이 기억나더라. 브랜드를 론칭할 때도 그랬다. 마리 카트란주(영국 디자이너)처럼 디지털 프린트를 해야 하나, 아니면 런던에 있으니 다리와 얼굴에 뭐라도 칠하고 펑크룩을 선보여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닌 것,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걸 할 순 없다는 결론을 낼 때 이 말이 생각났다."



Q : 졸업 뒤 브랜드 론칭이 꽤 빨랐다.

A :
"계획했던 건 아니다. 사연이 있다. 모든 게 졸업 작품에서 시작됐다. 보통 몇 벌의 미니 컬렉션을 선보인다. 여기서 점수를 잘 받아서 H&M 계열 브랜드인 위크데이(Week Day)와 협업을 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 윌슨 교수님 소개로 동유럽 출신 디자이너 브랜드 록산다일린칙에 취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였으면 그냥 브랜드에 몇 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졸업 작품이 '네프컨스 패션 어워드'에서 상을 받고, 네덜란드의 유서깊은 미술관에서 전시까지 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전시장에 가보니 정말 넓더라. 이걸 다 채우려면 주말에 짬짬이 준비한다고 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그냥 내 브랜드를 내서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Q : 대체 졸업작품이 어땠길래.

A :
"워낙 출중한 선배들이 많아서 새로운 걸 찾기가 힘들었다. 학부 전공이 패션이 아니어서 순수회화로 리서치를 했고, 뭔가 패션에서 구현할 수 없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게 됐다. 그 모티브가 된 게 이재효 작가 작품이다. 태운 나무로 작업을 하는 작가인데, 나무를 태워 시커멓게 형태만 남은 느낌을 옷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메일을 보내서 나무 태우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한국에 왔을 때 직접 만났다. 대학(홍대) 후배라고 많이 도와줬다. 어떤 나무가 잘 타는지, 숯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태워야 하는지 알려줬다. 졸업작품 드레스를 만들면서 실크와 리넨이 만나는 부분을 바느질 대신 나무와 같이 태워 붙였다. 불 온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색깔도 달라졌다. 단지 예쁜 옷보다 이야기가 되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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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패션스쿨 센트럴세인트마틴스 졸업작품. 나무를 태운 예술작품을 모티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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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레지나표가 한국에도 알려져 있다.

A :
"딱히 홍보대행사도 없는데 셀럽들이 직접 사서 입거나 셀럽의 스타일리스트가 연락을 줬다. 요즘은 패션 피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해외 브랜드를 금세 접하다 보니 홍보를 따로 안 해도 찾는 경우가 많다. 미국·일본·홍콩 등에서도 그런 식으로 연결이 됐다. 또 네타포르테 같은 온라인 쇼핑몰이나 스타일리스트들이 요즘은 작은 브랜드에 공을 들인다. '내가 발굴한 거야'라는 경쟁이 벌어지면서 나같은 신진에게도 문이 열린다. 한국에서는 배우 공효진 덕에 이름이 알려졌다. 은빛 드레스가 맘에 든다고 해서 협찬을 했는데 이후 동대문 시장에 카피가 쫙 깔렸다. 놀라운 건 대응을 했더니 오히려 상표도 없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초기에는 한국에서 셀럽이 연락을 해 오면 런던에서 항공택배로 협찬 샘플을 보내주고 했는데 배보다 배꼽이 크겠더라. 지금은 스타일리스트 친구가 사무실에 샘플을 몇 개 두고 연결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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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나표의 실버 드레스를 입은 배우 공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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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런던 출판계에서도 유명하다던데.

A :
"남편이 아일랜드 출신 셰프다. TV프로듀서를 하다가 전직했는데 요리뿐 아니라 음식에 관한 다양한 글을 쓴다. 2015년에는 나와 함께 한식을 주제로 2015년 『우리의 한식 부엌(Our Korean Kitchen)』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그게 가디언의 올해의 요리책에 뽑히면서 덩달아 나도 유명 인사가 됐다."



Q : 모든 게 평탄해 보인다.

A :
"그럴 리가. 브랜드 론칭하고 2016년 컬렉션까지는 죽을 쒔다. 세일즈 에이전트가 이런 스타일로는 안 팔린다고 사업을 접는 게 낫지 않겠냐고도 했다. 나도 다시 브랜드에 취직을 해야 하나 망설였다. 내 맘대로 충분히 해보지도 않았는데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2017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진짜 하고 싶은 걸 해봤다. 노란색 퍼프 소매 드레스나 은색 드레스가 그렇게 나왔다. 아까 말한 그런 레지나표 스타일을 보여주니 오히려 반응이 좋았고 기억해주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 SFDF 역시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Q : SFDF를 받은 뒤 어떤 계획을 세웠나.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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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영씨가 디자인한 주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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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4번 컬렉션에다 액세서리·슈즈를 다 하니까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 수상으로 1년 컬렉션 비용을 확보한 셈이니만큼 런던에 작은 쇼룸을 열면 어떨까 싶다. 레지나표의 이름만 듣던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고 갈 수 있는 곳 말이다. 보통 제품이 편집숍 형태로 들어가 있어서 쇼룸을 통해 브랜드를 충분히 구경할 기회를 마련하면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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