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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매경이 만난 사람] 문화유산과 4반세기…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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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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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하 나문답)를 쓰기 시작한 게 1993년부터입니다. 25년이 흐른 거죠. 그사이 한국 사회는 어마어마하게 변모했어요. 이걸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적에 가장 놀라운 건 '문명 수입국'이 '문명 공급국'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류'가 이를 상징해주고 있지요."

최근 서울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만난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68)는 최근 일고 있는 글로벌 '한류 열풍'이 "경이롭다"고 했다. 서구를 열렬히 모방했던 과거의 한국이 이제 더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은 지키되 발달된 남의 것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 형식',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어낸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힘'"이라고 했다. 무술년 황금개띠해를 맞아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그의 고견을 들었다.

―아무래도 '나문답'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지난여름 '서울편'(10권)도 출간하셨지요. 국내에서 교수님만큼 문화유산 알리기에 꾸준히 앞장서고 계신 분도 드물어요.

▷허허, 원래 제 인생 스케줄에 없던 책이었지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평론을 하면서 이런 바람은 있었습니다. 국민이 박물관 어디를 가든, 인근에 있는 문화재를 한번쯤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확립에 문화유산만 한 게 없으니까요. 자기 정체성도 세울 수 있고.

―1985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드셨어요. 이후 학생들과 답사를 다니신 게 집필 계기였던 걸로 압니다.

▷현장에서 문화유산을 함께 접했을 때 학생들이 (마음에) 간직하게 되는 무언가가 굉장히 크다는 걸 느꼈어요. 저 자신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서 이걸 어찌 전할까 고민했는데, 1991년 '사회평론'이라고, 지금은 폐간된 잡지에 연재하게 됐지요. 반응이 뜻밖에 좋았어요. 이후에도 은사이신 백낙청 선생의 도움으로 '창비'에 연재를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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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권이 100만부 넘게 팔리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캐치프레이즈가 유행을 탔어요. 1990년대 중후반 때만 해도 교수님 책을 들고 박물관을 찾는 사람이 참 많았다고 하죠.

▷혹시 그 구절 기억하나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1권 서문에 나오죠. 첫 권을 쓸 적에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거예요. 2권에서는 석굴암 얘기를 깊게 하고자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 울려퍼지나니"라는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 글귀를 인용했고요. 그리고 3권에선 백제의 '미학'을 얘기했어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백제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던 국가니까요.

―20여 년 전엔 북한에도 다녀오셨죠.

▷1997년이었지요. 이건 사건이었어요. 분단 이후 양 정부로부터 공식 허가 받고 북한에 간 건 제가 처음입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불법으로 간 거였고.(웃음) 금강산 사계절을 두루 누비며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그때 썼지요. 역사학자 김정기 교수(전 제주대 총장)가 이런 추천사를 써주셨어요. "그는 응달에서 멍든 문화유산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세계사의 지평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까지 제시하였으니 이는 진정한 민족주의의 승리인 것이다."

이제 일본·서울편도 냈으니 중국편도 내려 합니다. 2019년 상하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맞춰 출간할 것 같아요.

―이제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요즘 '한류'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방탄소년단, 싸이 같은 친구들을 볼 적에 '야,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는가' 싶어요. 우리는 부족하다고, 계속 발달된 서구 문명을 배우는 와중이라고 여겼는데, 저 멀리 서양에서 이들을 좋아해주고 심지어 배우고 있어요. 이거 도대체 뭔가. 문명사가들이 미처 그것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하나의 지속된 현상으로서 한류를 마주하게 된 거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광복 이후 서구를 열심히 모방해 왔지만 그러면서도 '휩쓸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식이 있었다고요. 자기 자신을 지키며 발달된 남의 것을 거부 없이 받아들여온 겁니다. 그랬기에 '한류'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구현해낸 거지요.

―한류의 '글로벌 스탠더드'라면 뭐가 있을까요.

▷지금 한류가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면 '우리 것을 살려 무엇을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 안에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것도 있고,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것도 녹아들어 있어요. 이 무슨 말이냐. 그냥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화학적으로 섞여 있는 겁니다. 생각해봅시다. 지구상에 과연 어떤 나라가 한국처럼 세계 각국 문화를 고르게 경험했는지를요. 오직 이슬람 문화만 없었지 기독교, 불교, 유교, 민주주의 심지어는 사회주의에 대한 간접 경험까지도 했어요. 이건 우리 지성사로 보았을 적에 바깥에선 찾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현상을 지속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층 인문학, 기본 예술, 기초과학 등에 지금이라도 꾸준히 투자해야죠. 우리나라에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오는 이유는 하나예요. 인프라 투자를 충분히 해줘야 20~30년 후 결실을 얻는 건데, 이게 부족한 겁니다. 연암 박지원 수필 중 이런 얘기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어느 느티나무 아래에서 노인이 '나는 어떡하면 좋으냐'고 통곡을 해요. 연암이 '왜 그러시느냐' 묻지요. 노인이 답해요. '여태 당달봉사로 살았는데 이곳에 앉아 갑자기 눈을 떴습니다. 근데 우리 집을 도통 못 찾겠습니다. 세상에 이리 길이 많은 겁니까.'

우리가 '문명 수입국'으로 살 적엔 2등이 갖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2등은 1등의 뒤통수만 보고 뛰면 되니 편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1등을 해버린 겁니다. 삼성전자도 스마트폰 1등, 엘지도 가전제품 1등. 그러니 이거 문제가 복잡해졌어요. 망망대해에서 직접 선택해야 할 시점이 온 겁니다.

보세요. 저 핀란드 노키아, 일본의 샤프가 왜 망했겠어요. 순간적인 결정을 잘못한 거지요. 우리가 지금처럼 1등을 한 건 기초가 탄탄해서가 아니에요. 한국인의 뛰어난 '맨파워' 덕분이었지요. 이제 그 밑바탕을 다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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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왼쪽)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지난해 12월 서울 경복궁역 맞은편에 있는 두가헌에서 만났다.


―교육의 역할도 중요하겠군요.

▷그렇지요. 특히나 역사 교육이 중요해요. 지금의 역사 교육은 단군 이래 한반도에 일어난 사건사고사 위주로만 다루고 있어요. 매일같이 전란에 외세로부터 깨진 내용이 나오지요. 그러면 은연중 역사적 좌절, 민족적 열등의식이 생길 수밖에요. 한편으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도 키워줘야죠. 거기에 필요한 게 우리의 찬란했던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먼저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외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겠지요.

▷이 얘기를 해야겠어요. 얼마 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를 만났어요. 총리 시절 공식 방문한 경험은 있지만 비공식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라 하더군요. 개인 일정으로 온 것인데, 저를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창덕궁, 종묘 등 한국 전통 건축물과 문화유산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서요.

―슈뢰더를 만난 건 처음이셨던 건가요.

▷처음이죠. 점심을 같이 먹는데 그가 한옥을 보고 싶다 했어요. 그래서 경복궁역 맞은편에 두가헌을 갔죠. 4시간가량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여러 얘기를 했는데, 나는 당신 나라 안젤름 키퍼 작품을 참 좋아한다, 그다음으로는 쾨테 콜비츠의 목판화와 조각작품에도 참 감동받았다고 말해줬어요. 베를린 현대미술관 2층에 있는 키퍼의 작품부터 폭격맞은 베를린 성당의 폐허 속에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자조각상이 참 감동적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이 전 독일 총리가 저를 참 신기하게 쳐다보는 겁니다.

―자기 나라 예술을 그리 잘 아니 놀랄 수밖에요.(웃음)

▷문화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구나 느낀 거겠죠. 그러면서 백자 달항아리 얘기도 해주었지요. 휴대폰 사진으로 보여주면서요. 슈뢰더가 그랬어요.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인상적인 문화가 한국에 있는 것이 사뭇 감동스럽다'고요. 청와대 본관 로비에 있는 촛불집회 그림(임옥상 화가 '광장에, 서')도 사진으로 보여줬어요. 현 정부는 촛불정국으로 만들어졌으니 소개하면 의미 있겠다 싶었지요. 그걸 보더니 한마디 던지더군요. '트럼프가 한국 오기 전에 이 그림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고.(웃음)

―말씀 주신 김에, 작년 촛불시위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도 초대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가 '세계사 편력'이라는 책을 썼지요. 여기서 네루가 딸에게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조선의 3·1운동이 너 나이대 여학생이 촉발시켰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지 않느냐. 사뭇 감동적인 대목이지요. 촛불시위도 그렇습니다. 비폭력이 승리한다는 걸 우리가 몸소 경험한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낼 수 없는 거지요. 그럼 이게 어떻게 가능했느냐. 승리에 대한 축적이 승화된 거죠.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와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 축제가 합쳐진 겁니다. 이건 어마어마한 민족적 자산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바라시는 게 있으신가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25년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건 한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을 잡아먹을 책이 아직 못 나온 거니까요. 제 책은 '내수용'이지 '수출용'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서구인에게 설득력 있게 얘기해줄 친구가 어서 나와줘야 해요. 중국 사람으로 치면 린위탕(林語堂) 같은 인물요. 그가 한 멋진 얘기가 있어요. 양각답동서문화일심평우주문장(兩脚踏東西文化一心評宇宙文章). 양발로 동서양을 밟아 한 마음으로 우주를 향해 글을 썼다. 이 같은 웅지와 기상을 가진 후배가 어서 나와주길 기대합니다.(웃음)

유홍준 교수는…

△1949년 서울 종로구 출생 △1967년 중동고등학교 졸업 △1980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등단 △1979~1983년 계간미술 기자 △1984년 한국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1985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1991년 영남대 조형대학 교수 △1997년 영남대 박물관 관장 △2002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2004년 9월~2008년 2월 제3대 문화재청 청장 △2008년 11월~2009년 3월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김시균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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