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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별별시선]닥터 펩신의 크리스마스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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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 창고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비닐봉지를 하나 발견했다. 거즈와 소독장갑이 들어 있는 지퍼백. 고이 간직하려고 잘 두었다가 오히려 잊고 지낸 뜻깊은 물건이다. 지퍼백에 붙은 스티커에는 ‘PAPSIN’이라고 적혀 있다. 잉크 색은 희미해졌으나 고마움은 12년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경향신문

닥터 펩신. 청각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의 인공와우 수술을 집도한 캐나다 토론토 어린이병원 의사이다. 우리가 닥터 펩신에게 그토록 고마워하는 까닭은 비단 수술 결과가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의술이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仁術)이라는 사실을 우리 가족에게 처음으로 확인시켜준 의사였다. 닥터 펩신 덕분에 병원 의사들에 대해 우리가 가졌던 고정관념을 깰 수 있었다.

2005년 봄 큰아이는 중학생이었다. 어느날 교육청 담당자가 우리와 만나자고 했다. 그는 학교에서 특수반과 일반반을 오가며 수업을 듣던 아이를 지켜보았다면서 “인공와우 수술을 하면 효과가 클 것 같으니 병원에 수술을 신청하라”고 권했다. 비록 어렵기는 해도 보청기를 끼고 수화 없이 소통은 하던 터라 우리는 수술에 별 관심이 없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채 전문가가 권하니 서류나 넣어보자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어린이병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를 불러 각종 검사를 했다. 청력검사 담당자인 오디올로지스트가 수술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진행했다. 6개월 동안 이루어진 여러 검사 결과를 가지고 오디올로지스트와 언어치료사, 수술 담당 의사가 모여 회의를 했다. 수술을 하면 효과가 있겠다는 결론이 나오자 수술 날짜가 바로 잡혔다. 수술하기 며칠 전 우리는 담당 의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닥터 펩신이었다. 홍보 비디오를 통해 다른 사람이 수술 받는 장면을 보았던 아이는 약간 겁을 먹었다. 닥터 펩신은 아이의 얼굴 표정을 보더니 이렇게 안심시켰다.

“너, 게임 좋아하지? 수술 받으면 게임할 때 너무 좋아. 소리가 훨씬 잘 들리거든. 걱정하지 마.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이야. 나, 이래 봬도 이 방면에서는 꽤 유명한 의사야.”

의사 얼굴처럼 아이 얼굴도 밝아졌고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성년자라 해도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수술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닥터 펩신은 아이와 보호자 앞에서 늘 미소 띤 얼굴이었다. 의사의 굳은 표정과 딱딱한 목소리에 익숙해 있던 우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닥터 펩신은 친절했다.

수술은 예정보다 길어졌다. 한참이 지나 닥터 펩신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수술복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보고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닥터 펩신은 마스크를 벗더니 우리더러 앉으라고 했다. 커피도 마시며 들으라고 했다. 우리는 ‘수술이 잘못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닥터 펩신도 우리 앞 소파에 앉더니 “수술은 잘되었다”며 수술이 지연된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는 천천히 부드럽게,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말했다.

일주일쯤 지나 아이는 실밥을 풀었고 새로운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우리 가족은 닥터 펩신에게 감사 카드와 선물을 보냈다. 곧 답장 카드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경에게. 내가 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수술)을 줬다고 너도 나한테 선물을 보낸 거로구나. 와,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는 수술하는 의사라서 손을 잘 보호해야 하잖아. 네가 준 장갑 끼고 우리 아이들 하키 구경갔는데, 진짜 딱이더라. 이번 겨울에는 네 선물 덕분에 춥지 않겠다. 내가 너한테 준 선물, 너도 마음껏 즐기기 바란다. 닥터 펩신.”

그해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수술보다 큰 선물은 환자와 가족에 대한 의사의 다정다감한 태도였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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