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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이달의 예술 - 연극] 비무장지대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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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성 연출 ‘워킹 홀리데이’

중앙일보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평론가


연출가 이경성과 극단 배우들은 올봄, 여름 그리고 가을에 서울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현실이 사라진, 인간의 자취가 없는’ 공간인 비무장지대 300㎞를 걸었다. 맨발은 아니었지만, 맨몸과 맨손으로, 그들은 그림자와 함께 뜨거운 날들을 온몸에 실어 담았다.

연극 ‘워킹 홀리데이’(서울 두산아트센터, 11월 7~26일)는 걷는 나날이 황홀했다는 뜻이지만, 남북한 분단의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고통스럽게 말하고 있다. 분단 현장을 땀 흘리며 걸었던 그들의 시간과 육체적 감각이 연극의 근원인 텍스트가 됐다. 걷기는 자발적 행위이지만, 전쟁이 멈춘, 텅 빈 경계의 땅에 대한 성찰은 고통스러운 천국이 됐을 것이다. 연출가는 걷기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현실 문제를 깨달았고, 공연은 관객과 나누는 상징적 행위에 이르렀다. 걸으면서 사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극을 만드는 방식은 이들의 연극 행위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와 같았다는 절박한 의지로 읽힌다.

중앙일보

배우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분단의 여러 풍경을 보여준 연극 ‘위킹 홀리데이’. [사진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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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는 공연을 끝낸 후 “어떻게 분단 문제를 말해야 하는지를 숙제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젊은 연출가가 공연을 통해 깨달음과 같은 실천적 화두를 만났다는 고백이 참 듣기 좋았다. 우리들 모두에게 분단 현실은 말하기 어려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 그 근원과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판단과 분단 이후 남북 통일에 관한 이념적 논의는 언제나 자유롭지 못했고, 공론화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연출가 이경성, 그가 배우들과 함께 만든 연극은 텍스트를 쓰기 위해서 현장에 빠져들고, 그 경험과 기억을 몸속에 저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공연은 배우들의 걷기와 토론 그리고 육체적 기억, 심리적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삶을 읽는 산물일 터이다. 배우가 길 위를 걸으면서 보고 경험한 것을 무대 위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이 성찰이지, 현기증 나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한 연기는 배우로서 생의 근원에 이르는 위험한 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감각해진 존재가 된 분단의 산물인 비무장지대가 이들의 감각과 사유로 이어지는 동안, 관객들은 이들의 연극으로 현실을 다시 읽게 된다. 갈라진 땅인 그곳이 ‘우리의 땅’이 되는 동안, 연극은 우리의 삶을 달리 보이게 하는 충격일 터이다. 비무장지대라는 땅이 인간의 땅이 되는 순간이야말로 연극의 근원이며, 삶의 ‘홀리데이’이다.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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