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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friday] 날 닮은 아들을 구박하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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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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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짝과 결혼하시겠습니까?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중년 남성은 70%가 그렇다고 대답했고, 여성은 25%만이 고개를 끄덕였다더군요. 같이 살다 보면 환상이 깨지고 실망이 느는 건 남녀가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 아내들이 더 진저리를 치는 걸까요?

오늘의 사연을 통해 하나의 가설을 세워봄 직도 합니다.

홍여사 드림

심란한 요즘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십수 년 전 12월의 어느 밤 추억의 한 장면을 먼저 꺼내놓아야겠습니다. 공간은 대학로의 어느 카페이고, 저는 그 자리에 아내와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적어도 외모만큼은 호감 가는 타입이다 싶은데, 뜻밖의 상황이 일을 망쳐놓더군요. 상사에게서 긴급 호출이 온 겁니다. 회사로 잠깐 들어오라고요.

난감한 사정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지만, 이미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에 맥이 풀리더군요.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는, 아니 그녀는 선선히 말하는 겁니다. 다녀오라고. 기다리겠다고요. 세상에 뭐 이런 아가씨가 있나 싶더군요. 그런데 그게 또 다가 아닙니다. 한 시간 넘게 걸려 돌아와 보니, 카페 분위기가 왁자하더군요. 연말 이벤트로, 퀴즈대회(?)가 열린 모양인데, '그녀'가 열성적으로 정답을 맞혀 경품인 와인 한 병을 따놓은 겁니다.

훗날 아내는 말하더군요. 자기는 그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 제 옆모습을 보는 순간 이미 저한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고요. 중요한 결정일수록 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본인 성격이랍니다. 이렇듯 우리 둘은 정반대의 성격에 이끌려 만났습니다. 저는 아내의 솔직함과 열정에 반했고, 아내는 아마 그와 반대되는 저의 그 무엇에 끌렸던 겁니다.

아내와의 만남을 이제 와서 다시 새겨보는 이유는, 그러나 흘러간 추억에 젖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로 맺어준 그 극적인 '성격 차이'가 최근 들어 이상한 방향으로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에게는 초등생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녀석이 극과 극의 반대 성격입니다. 아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저를 닮았습니다. 식성, 잠버릇, 말투, 걸음걸이에, 성격까지 판박이네요.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한 성격, 섬세하면서 까다로운 성격, 느긋하면서 굼뜬 성격 말입니다. 반면 딸아이는 아내가 찍어낸 붕어빵입니다. 늘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깔깔대고 아무하고나 잘 사귀고, 재주가 많은 아이죠.

남편을 닮은 아들과 아내를 닮은 딸이라니, 더 바랄 나위 없는 정경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이 겪고 있는 매일매일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아내는 자신을 닮은 딸과는 찰떡궁합이면서, 저를 닮은 아들과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딪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의 사춘기가 원인인 줄 알고, 세월이 가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아들의 문제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의 타고난 성격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이유였죠. 저를 닮아 느리고 까다롭고 표현이 없는 성격이 말입니다.

아내는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합니다. 딸아이가 뾰로통해 있으면 구슬리고 웃겨가며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냅니다. 하지만 아들의 얼굴이 어두우면, 비아냥이 쏟아지죠. 괜히 분위기 잡지 마라. 엄마는 네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야.

감정 쓰레기통이라니, 그게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할 소린가요? 참다 못해 제가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아내는 더 기막힌 말로 제 입을 막습니다. 도대체 넌 누구 닮아서 그 모양이니? 네 와이프가 누가 될지 내가 다 미안하다.

저는 정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신중한 성격에 믿음이 가서 좋아했다면서, 저를 닮은 아들한테는 왜 저러는 걸까요? 제가 여전히 아내의 열정적인 성격을 좋아하고, 아내를 닮은 딸아이한테 미치도록 반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이해가 안 갑니다. 아내는 혹시 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려고 애꿎은 아들을 잡는 걸까요?

그러나 언제 한번 속시원히 물어보지도 못하던 그 의심은, 며칠 전의 사소한 일로 허무하게 풀려버렸습니다.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그날따라 아내가 아들의 발톱을 깎아주는 중이더군요. 아들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엄마가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평화로운 모습에 저도 마음이 좋아, 곁에 앉았지요. 그런데 그때 아내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온 혼잣말. '어떻게 발톱까지 또옥 닮았냐?'

순간 저는 멍해졌습니다. 제 둔한 머릿속에 난생처음 번개가 치더군요. 제 발톱은 아들처럼 그렇지를 않습니다. 발톱이 그런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죠. 넌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은 이제 보니 저를 향한 화살이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염두에 둔 말이었죠.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저를 닮은 만큼이나 제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까다롭고 과묵하신 분입니다. 자식인 저에게도 어려운 분인데 며느리가 느끼기에는 오죽할까요? 사정상 합가해 살던 몇 년 동안, 덜렁덜렁 실수가 많았던 아내는 무언의 눈빛으로만 나무라는 어머니를 오히려 더 힘들어했습니다. 감각도 예민하시고, 계산도 철저하시고, 절약 정신도 대단하셔서 도무지 빈틈이 없으신 분이기에, 긴장을 풀 수가 없다더군요. 아내의 타고난 유머와 애교에도 별 반응이 없으셨으니 아내에게는 역부족의 상황이었을 겁니다. 제가 아는 한, 아내에게 끝내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우리 어머니뿐입니다. 그야말로 성격 차이 때문이겠죠. 반대 성격의 남녀는 음양의 조화로 화합할 수 있어도, 고부간엔 그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

속을 알고 나니, 아내에 대한 서운함은 서글픔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천하에 쿨한 여자도 고부 갈등 앞에서는 치졸해지는구나 싶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내를 무슨 말로도 나무랄 수가 없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동안 아내가 기울여온 노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분가한 이후에도, 소홀한 며느리는 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다했습니다. 아마, 타고난 성질대로 했다면 대놓고 말했겠죠. 어머닌 도대체 저한테 뭘 바라시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면, 이젠 찾지를 마세요. 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성격을 죽였습니다. 직선을 구부리고 모를 깎았습니다. 그러자니 어떻게 마음에 그늘이 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다 저를 위한 일이었겠지만, 애초에 그럴 일이 아니었지 싶습니다. 속에 울화를 쌓으면서까지 어머니와의 관계에 연연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분풀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아내의 눈화살을 맞는 자리에, 아들 대신 제가 서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만나서 겪은 일이고, 나를 위하느라 감당한 일이니, 나를 미워하라고 말해야겠습니다. 당신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이제 마음에 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말입니다.

※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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