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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남곡, 좌도우기] 마음을 내고, 지갑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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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부이호례’는 부유하면서 예(禮)를 좋아한다는 말인데, 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사이좋음이고, 사이좋음은 부(富)가 부정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 부를 어려운 사람들과 나눌 때 저절로 온다. 나눔을 좋아하는 것이 성숙한 부자(중산층 이상)의 징표다.



한겨레

이남곡
인문운동가


한 해를 보내면서 올해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문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소회와 희망을 말하고 싶다. 나는 근래 인문운동의 도구로 나이 60이 넘어 처음 접한 논어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강 두 가지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며 조선을 멸망하게 한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어온 유학은 공자를 너무 왜곡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사문난적(斯文亂賊)류의 편싸움에서 벗어나는 뿌리의 작업이라는 점과 두 번째는 논어가 세계 특히 아시아의 공동의 인문자산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람이 많아져 마을을 이루면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첫째가 부(富), 다음이 교(敎)라고 답한다. 이것은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 특성을 통찰한 것이다. 부가 먼저지만 교양, 즉 정신적 성숙의 바탕으로 될 때만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항산이라야 항심이다’는 말은 너무 잘 알려진 말이다. 그런데 곳간은 채워졌는데 인심이 안 나면 그 사회는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부자가 교만하지 않기는 쉽지만 가난한 사람이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가난은 일반적으로 정신이 성숙하기 어려운 조건이며, 원망과 아첨은 서로 반대 방향 같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보는 것이다. 부자에 대한 원한이 때로는 변혁 운동의 동력으로도 작동하지만 실패한 민란을 벗어나기 힘들고, 그 뿌리의 부와 권력에 대한 갈망은 결국 새로운 세상을 열기보다는 낡은 사회에 대한 투항으로 이어지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진심으로 원하는 변혁의 주체는 어떠해야 할까? 제자가 묻는다. ‘정신적 성숙의 목표는 빈이무첨(貧而無諂: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는다)과 부이무교(富而無驕: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다)일까요?’ 공자는 그 목표를 상향시킨다. ‘빈이락(貧而樂)과 부이호례(富而好禮)만 못하다.’

‘빈이락’은 가난을 즐기라거나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눈을 돌리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요즘 말로 표현해보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나 집단이라면 물신의 지배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의 방식(문화)을 만들어가고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사명감이나 가치관만으로는 멀리 넓게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이호례’는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한다는 말인데, 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사이좋음이고, 사이좋음은 부가 부정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 부를 어려운 사람들과 나눌 때 저절로 온다. 나눔을 좋아하는 것이 성숙한 부자(중산층 이상)의 징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여러 경제 주체들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고, 협동조합과 같은 사람 중심의 수평적(탈계급적) 경제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남원시 산내면에 귀농한 소농들의 이야기에서 깊은 감동을 맛보았다.

“오가작통 같은 것은 어떨까? 산내에서 우리 손으로 기본소득을 해보자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말 그대로 5가구가 한통(팀)이 되어 자기 소득의 일부를 모아 청년 1명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것, 약간의 물질적 도움으로 이것저것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0가구가 뜻을 내어 적게는 월 5만원, 많게는 10만원씩 출연, 기금을 만들어 산내에 사는 3명의 청년에게 매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을 1년간 선물처럼 주고 있다.”

넉넉지 않은 주머니를 열어 청년활력기금을 만든 것이다. 이런 방향의 자조 노력의 확산은 아마 기본소득의 제도적 확대로 이어지는 가장 건강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인공지능 등에 의한 기술혁명은 지금까지의 상상력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자본주의의 고도한 생산력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향한 구체적 이정표를 절실하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이정표는 혁명적이지만 평화적이며 점진적인 제도의 변화와 탐욕과 갈망에서 벗어나려는 인문적 자각의 상호 삼투로 이뤄질 것이다.

한국이 이 길에서 선두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가 존경하는 위엄 있는 나라를 위하여, ‘마음이 풍부한 사람은 마음을 내고, 지갑이 넉넉한 사람은 지갑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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