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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고시 합격기’의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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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시폐인’, ‘고시낭인’ 같은 말이 보여주듯 고시를 준비하다 망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위험부담이 큰 길을 택했을까? ‘입신출세욕’ 같은 단어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시광풍의 배경엔 그런 것보다 훨씬 음울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억울함(resentment)과 몰사회성이다.



한겨레

박권일
사회비평가


요즘 ‘고시 합격기’ 독서에 빠졌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사법시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내가 보기에 여전히 한국은 ‘고시의 나라’다. 읽을수록 확신이 든다. 근대 한국인의 정신적 동력을 이만큼 곡진한 민중서사로 풀어낸 텍스트는 드물다.

‘사시폐인’, ‘고시낭인’ 같은 말이 보여주듯 고시를 준비하다 망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위험부담이 큰 길을 택했을까? 단순히 ‘입신출세욕’ 같은 단어로 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시광풍의 배경엔 그런 것보다 훨씬 음울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합격기에는 모종의 공통된 정서와 인식이 드러난다. 바로 억울함(resentment)과 몰사회성이다.

가난했지만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며 학문의 즐거움을 비로소 알게 된 학생은 그러나 학문의 길 대신 고시의 길을 택하게 된다. “우리 학교를 밥통대라고 비유하던 얼치기 시사만화꾼에게 분통이 터져서 보란 듯이 고시에 붙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의 직업에 큰 불만이 없이 잘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고시생이 된다. “그녀로부터 ‘저의 부모님이 초등교사는 싫대요’라는 말을 들을 때 피가 역류하는 듯한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은 “사회의 냉대와 뼈저린 차별대우에 좌절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고시는 대학 졸업생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자기 다짐 속에서 “목적 달성이 이루어지는 날 난 죽어도 좋다는 극한 생각까지 동원해 사시에 대한 돌입을 채찍질”하기에 이른다. ‘번듯한’ 대학에 간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 법대에 들어와서 1학년 내내 열등감 속에서 생활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곧장 사시로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고시는 열등감·패배감으로 가득 찬 내 인생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고 “이 과정의 승패에 내 인생의 승패가 걸려 있”는 까닭이다.

학벌위계 최상위인 서울대 법대 출신의 합격기에서 억울함의 정서는 도드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다른 글처럼 개인 차원에 매몰되어 있을 뿐, 고시제도를 포함한 사회 모순에 대한 사고는 정지되어 있거나 괄호 쳐져 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는 식의 천편일률적 다짐으로 사회적 인식을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수백 편의 합격기 중 첫 문단부터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이질적인 글이 있었다. 1980년대 어느 사법시험 수석합격자의 것이다. 글쓴이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기도 했는데, 그 집단 내에서만이 아니라 사시·행시·외시 등 모든 고시 합격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난 이렇게 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대신 그는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고시의 길이 출세의 길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서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받아들여도 좋을까?”라고 묻는 것이다. 질문은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 자신이 먼저 일정한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일정한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소위 ‘먼저 열심히 공부하여 힘을 기른 다음에 행동하라’는 논리는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 “힘을 기른 후에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았을 때, 뿌리 뽑아야 할 그 부조리와 부정부패의 한가운데에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저 글의 주인공은 최근 대법관 후보로 오르내리는 김선수 변호사다. 고시 합격기에서 독보적으로 빛나던 성찰적 지성은,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던 그의 삶으로 오롯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그를 영웅시하는 대신에, 그를 본받아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김선수 같은 개인은 그토록 예외적일까? 열심히 공부한 한국의 엘리트들은 어째서 그토록 천박할까?

답은 명료하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개천용’ 타령을 하며 대다수의 존엄을 일상적으로 짓밟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개천용’이라는 말이 성행하는 사회는 극소수 ‘용’에게 특권을 몰아주는 사회이며, 노력의 동기가 탁월성의 추구에 있는 게 아니라 멸시의 공포에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대체로 함께 참담해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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