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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박찬수 칼럼] ‘제왕적 대통령’ 대신 ‘제왕적 총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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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1987년 개헌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국민 열망이 숱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헌법 개정을 가능케 했다. 30년이 흘러 대통령제 폐해의 반작용으로 다시 개헌이 논의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지점이 있다. 제도로서 ‘대통령제’는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직선제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겨울 무도한 권력자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촛불 정신은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심판할 수 있다’는 국민주권론의 새로운 구현일 것이다.

지금 국회의 개헌 논의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건 바로 이것, 직선제 정신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국회는 ‘제왕적 대통령’을 제어하는 데 골몰하다가 ‘직선제 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회에서 작성한 정부형태에 관한 보고서는 그런 단적인 사례다. 이 보고서는 자문위 정부형태분과에서 만든 것이고, 국회 개헌특위 공식 의견은 아니다. 그러나 개헌의 방향, 특히 가장 민감한 권력구조에 관한 논의의 흐름을 가늠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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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개헌특위 자문위 정부형태분과에서 11월에 작성한 보고서. 혼합정부제로 개헌할 경우, 통일·외교·국방 장관을 제외한 다른 장관 임명권을 모두 국무총리에게 주도록 헌법조항 시안을 마련했다. ‘제왕적 총리’의 탄생이란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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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개헌 때 정부형태로 ‘혼합정부제’(이원정부제)와 ‘대통령 4년 중임제’ 두가지를 제시하고, 주요 쟁점과 헌법 조문 개정 시안을 예시했다. 자문위는 둘 중 어느 방안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전체 맥락을 읽어보면 혼합정부제에 훨씬 무게가 실려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자문위 관계자는 “내부에선 혼합정부제 채택 의견이 압도적 다수였다.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굳이 대안으로 넣을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혼합정부제로 개헌할 때 헌법 조문에 담길 내용을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직선으로 뽑은 대통령에겐 통일·외교·안보 분야 권한만 주고, 나머지 국정운영의 모든 권한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국무총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몇가지 핵심 조항은 이렇다.

“헌법 제89조, 내각위원(장관)은 총리가 제청한 사람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다만, 통일·외교·국방 등 대통령 권한과 관련된 부처 장관인 내각위원은 총리 의견을 들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95조 내각회의(현 국무회의)는 행정부 권한에 속하는 중요 정책을 심의·의결한다. 내각회의 의장은 총리가 된다.

제96조 국정 기본계획과 정부 일반정책, 예산법률안, 부처 중요 정책의 수립과 조정, 공무원 임명과 정부 권한에 속하는 인사, 그밖에 대통령이 내각회의 심의를 요구한 사항 등은 내각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 시안대로 헌법을 개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현재 대통령이 갖는 권한의 대부분이 국무총리에게 옮겨진다. 국무회의 격인 내각회의가 정부 주요 정책의 결정·집행권과 인사권을 갖는데, 이 내각회의 의장을 총리가 맡는다. 부처 장관 임명권도 총리에게 있다. 대통령은 오직 통일·외교·국방 장관 임명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통일·외교·국방 분야 고위직 인사권은 총리가 의장인 내각회의에 속한다. 대통령이 제왕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내치와 외치를 분리하는 혼합정부제를 하자면서, 지금의 대통령 권한을 그대로 총리의 손에 쥐여주자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 대신 ‘제왕적 총리’의 탄생이다.

그나마 ‘제왕적 대통령’은 국민 손으로 뽑았으니 최후의 순간 국민의 제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제왕적 총리’를 선출하고 나중에 그만두게 하는 권한은 국민이 아니라 국회에 있다. 국회가 대의기관이긴 하지만, 국민 직선으로 뽑은 대통령에겐 제한된 권한만 주고 국회 선출 총리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주는 체제가 진정으로 ‘대의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민 직선’의 취지와 역사적 맥락을 훼손할 뿐이다.

지난해 12월 구성된 국회 개헌특위는 1년간 쳇바퀴만 돌다가 질곡에 빠져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권력구조를 둘러싼 이견과 논란일 것이다. 그 이면엔 대통령의 ‘제왕적 속성’을 빼기 위해 총리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려는 시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국회와 그 주변에서 호응받는 이런 방안은 대중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직선제 정신에 대한 국민 지지는 여전히 확고해 보인다. 개헌이 현실화하려면 적어도 정부형태에선 국회가 국민 다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걸 부정하려는 순간, 30년 만의 개헌 기회는 날아갈 수밖에 없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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