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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원본과 차이 없는 시 번역은 불가능…번역자 평생 노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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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한중시인회의, 경북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11일 열려

정현종·천양희, 중국의 수팅 등 양국 시인·문학평론가 참가

상대 언어로 번역된 시 읽고 느낀 점, 번역 문제점 등 얘기 나눠

중앙일보

제1차 한중시인회의 참가자들. 앞줄 왼쪽부터 이시영·천양희 시인, 김주연 문학평론가, 정현종 시인, 한동수 청송군수, 중국 문학평론가 우쓰징, 홍정선 문학평론가, 중국 시인 수팅·쯔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쉬리밍 난징대 교수, 여섯 번째 오형엽 문학평론가, 김명인 시인, 중국 시인 옌리, 중국 문학평론가 쟝뤄수에. '번역의 이상과 현실'을 주제로 지난 11일 하루 종일 토론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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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경북 청송 대명리조트에서 흥미로운 '문학실험'이 벌어졌다. 한국과 중국의 이름 있는 시인들이 상대 언어로 번역된 서로의 시 작품을 번갈아 읽은 다음 문학평론가와 함께 작품 품평을 하고, 시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종의 워크숍이었다.

가령 짧은 시 '섬'으로 유명한 정현종(78) 시인의 작품 '이슬'의 한국어 원본, 중국어 번역본을 나란히 앞에 두고, 국내에도 시집이 소개된 중국의 수팅(舒?) 시인과 문학평론가 우쓰징(?思敬·수도사범대 교수)이 차례로 감상 소감을 밝혔다. '번역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차 한중시인회의의 풍경이다. 서늘한 감동을 전하는 시 작품이 흔히 바다처럼 넓다고 표현되는 번역의 장벽을 뛰어넘어 외국어로 제대로 번역될 수 있는지를 집단적으로 살피는 전례 없는 문학 이벤트였다.

덕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던 워크숍은 오전 행사의 마지막 순서인 이시영(68) 시인의 작품 번역을 검토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어로 번역·소개된 이씨의 두 작품 가운데 '당숙모'라는 짧은 시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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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을 낭송하는 이시영 시인. &#34;번역자에 누구냐에 따라 시 내용이 달라진다&#34;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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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되똥되똥 걸어와 후다닥 헛간 볏짚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사이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비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다시 일 나간다'.

한국 참가자들에게 이씨의 '당숙모'는 어려울 게 없다. 표면적으로는 알 낳는 암탉을 묘사하고 있지만 정작 당숙모를 그렸다는 점을 파악하는 게 감상 포인트. 문제는 '구시렁구시렁' '되똥되똥' '오물락거리며' 같은, 한국어 특유의 의성어·의태어를 어떻게 중국어로 옮겼느냐다. 이 시를 번역한 이는 난징대 한국어문학과 쉬리밍(徐黎明) 교수로 이시영 시인의 시를 10년 넘게 연구하며 번역해왔다. 그는 '구시렁구시렁'은 '잔소리하다'는 뜻의 중국어 '??(laodao)'로, '되똥되똥'은 '비틀거리다'라는 뜻의 '??(liangqiang)'으로 각각 번역했다고 소개했다. 중국 측 참가자들은 이날 소개된 8편의 한국시 가운데 '당숙모'가 가장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번역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구시렁구시렁' 등에서 느끼는 익살과 푸근함을 중국 독자들도 느낄 수 있는 번역인지는 미지수다. 오전 행사를 진행한 문학평론가 김주연(전 한국문학번역원장)씨도 그런 점을 고려해 "시 번역에 있어, 방언이나 의성어, 의태어, 비교언어학, 음성학, 음운론, 이런 것들과 관련된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한 게 오전 회의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라며 "오늘 같은 회의가 많아져야겠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시 번역은 소설 번역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소설이 사태를 풀어 설명한다면, 시는 상징을 통해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특징 때문에 시는 같은 언어 사용자에게도 종종 어렵게 느껴진다. 시 해석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이날 회의의 참가자들은 이중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답 없는 시 해석을, 불명료한 번역을 통해 감상한 후, 나름대로, 그것도 공개적으로 시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김명인(71) 시인의 작품 '천지간'을 둘러싼 한·중 참가자들의 논의는 그런 어려운 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마치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풍경 같았다. 오해와 오독이 엇갈리고, 그 결과 역설적으로 시 해석이 풍부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천지간'의 전문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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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한중시인회의. 두 나라 시인·문학평론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 번역의 어려운 점들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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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놓는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여름밤은 너무 짧아 수평선 채 잠그지 못해

두 사내가 빠져나와 한밤의 모래톱에 마주 앉았다

이봐,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려놓으면 바다가 다 메워질 거야

그럴 테지, 사방을 빼곡히 채운 이 어둠 좀 봐

막막해서 도무지 실마릴 몰라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겹쳐

밤새도록 철썩거리며 파도가 오고

그래서 망연한 여름밤 더욱 짧다

어느새 아침 해가 솟아

두 사람을 해안선 이쪽저쪽으로 갈라놓는다

그 경계인 듯 파도가

다시 하루를 구기며 허옇게 부서진다'

낱낱이 해명하긴 어려운 작품이지만, 하나의 감상 포인트는 정체불명의 두 사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중국 문학평론가 쟝뤄수에(江弱水·54)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 사이의 대화의 어려움, 교류 불가능성을 표현한 것 같다"고 했다. 중국 시인 옌리(?力·63)는 두 사내를 동양과 서양으로 읽었다.

그러자 창작자인 김명인 시인이 나서 "'천지간'은 어떤 경계에 관한 이야기다. 두 사내는 각각 하늘과 땅, 낮과 밤의 대표자로 볼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논의가 뜨거워지자 문학평론가 홍정선(인하대 국문과 교수)씨까지 끼어들어 "중국 평론가는 어렵다고 했는데,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어둠 속에 묻힌 하늘과 땅이 사실은 수평선에 의해 갈라져 있다는 점이 아침 해가 솟으면서 드러나는 장면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음미하면 질서 있게 파악되는 작품"이라며 "번역시에서는 그런 점을 느낄 수 없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한중시인회의는 2007년부터 11년간 한중작가회의를 이끌었던 홍정선씨와 청송 객주문학관 명예관장인 소설가 김주영씨가 합작해 개최했다. 그간의 교류 위주에서 탈피해 내실을 꾀하자는 취지다. 청송군(군수 한동수)과 한국문학번역원이 후원했다.

쉬리밍 교수는 "아무리 노력해도 원본과 차이 없는 이상적인 번역은 불가능하리라는 점을 뼈아프게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는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 문학 사이에서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겠다는 얘기였다.

청송=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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