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2 (일)

손종학 "미생 마부장 같은 인생 캐릭터 또 만났으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조연배우다-3] 배우 손종학(50). 비슷한 연배라면 모를까, '2030세대'(20·30대)에게 그의 이름은 다소 낯설다. 얼굴은 본 것 같긴 한데, '누구였지' 하고 생각하다 보면 쉽게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조연들이 늘상 겪곤 하는 이 '의문의 1패'는 베테랑 배우 손종학에게도 비켜갈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래도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했다. 착실하게 사는 이에게 영광의 빛줄기는 어느 순간 내리쬐는 법. 손종학에겐 3년 전 요맘때가 그러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14년 10월 첫 방영을 시작해 그해 말 종영한 tvN 드라마 '미생'에 캐스팅된 것이다. 무턱대고 극단 일을 시작한 지 어언 27년째에 접어든 시기였다. 이 우연찮게 출연한 17부작 TV 시리즈는 손종학이라는 존재를 남녀노소 대중에게 각인시킨 일대 계기가 된다. 희대의 '꼰대' '마초' 상사 마복렬 부장으로 분하면서 말이다.

매일경제

손종학은 연극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대중에게 사랑받는 배우다. /사진=양유창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손종학 이름 석 자는 몰라도 '마 부장'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기실 배우란 이름보단 배역으로 기억되는 것일까. 이 악독한 마초 상사는 '미생'에서 없어선 안 될 감초 캐릭터였다. 그 흔한 로맨스 코드 하나 없이 이 시대 직장인들 애환을 절절이 녹인 '미생'에서 마 부장의 존재는 특히나 각별했는데, 말하자면 오상식 과장(이성민)과 저 먼 대척점에 선 기피 1순위 상사였던 것. 올 초 문유석 판사가 쓴 유명 칼럼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의 첫 번째 수신자는 바로 이 마 부장이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나 뒷목 잡게 될지 모를 일이나, 극중 마 부장의 '암 유발' 명대사(?) 일부만 복기해보자.

"아니, 대체 애를 몇이나 낳는 거야? 애 둘이라고 하지 않았어? (중략) 애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임신이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성희롱? 그게 왜 성희롱이야. 파인 옷 입고 온 그 여자가 잘못이지. 그래서 내가 뭐 만지기를 했어, 들여다보기를 했어. '숙일 때마다 그렇게 가릴 거면 뭐하러 그런 옷 입고 왔니. 그냥 다 보이게 둬.' 이 말이 성희롱이야, 어? 성희롱이야? 반어법이잖아."

"커피 좀 타오라는 것도 성추행이래요. 시집 못 가는 거 걱정해주는 것도 성추행이래요. 이 놈의 기 센 여자들 등살에 살 수가 없어!"

그리하여 최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손종학에게 '마 부장' 얘기부터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경제

드라마 `미생`에서 배우 손종학은 악독 상사 마복렬 부장으로 분해 인기를 모았다. /사진제공=tvN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매일경제

드라마 `미생`에서 안영이에게 호통치는 마복렬 부장. /사진제공=tvN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안영이(강소라)를 그리 괴롭혔는데, 주변에서 뭐라 안 했어요?

"에이 뭐, 욕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의외로 더 친근하게 대해주시던걸요. 식당에 가면 '마 부장, 술 한잔 받으소!' 하며 탁 때리고 가고, 허허."

-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마 부장은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캐릭터 중 하나예요. 그런데, 직장 생활해본 적 없으시다면서요.

"회사 생활 경험만 없을 뿐이죠. 극단 자체가 어지간한 직장보다 군기가 세요. 위계가 있고 엄격하고. 과거엔 '빠따(야구방망이)'로 맞고, 기합받고 이런 건 흔한 광경이었어요. 직장 안 다녀봤어도 주변에 회사원들이 좀 많겠어요. 얘기 들어보면 알지. 저도 밥벌이하는 직장인이나 마찬가지예요."(웃음)

-'미생' 출연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였죠?

"보자…. 김원석 감독 만난 날이 베트남 합작 드라마 찍는다고 하노이로 출국하기 전날이었어요. 부랴부랴 짐싸고 있었는데, 제작사 대표가 전화하더군요. 가기 전에 미팅 좀 하고 싶다고. 그래서 짐 싸다 말고 밤 11시에 경기도 일산으로 갔어요. 거기서 김 감독을 처음 만났죠.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감독이 그러대요. 영화 '일대일'(감독 김기덕·2014)에서 연기한 변오구에서 '마 부장'을 보았다고. 근데 나중에 캐스팅 후 들은 말이지만, 제작진에서 그날 미팅하고 조금 고민했대요. 예상보다 순하게 생겼다면서, 허허."

-마 부장이 참… 뭐랄까요. 지금 생각해도 현실에 너무 있음직한 캐릭터여서…. 너무 리얼한 악독 상사랄까요?

"나는요, 그가 순전한 악역이라고만 생각하진 않아요. 그런 기질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 모든 인간에게 다 있다고 보거든요. 마 부장이 그렇게 권위의식에 똘똘 뭉쳐서 사는 건 그게 다 자기 나름의 처절한 생존 방식이었을 거라고 봐요. 한편으로 얼마나 치열한가, 그리고 불쌍한가 싶기도 하고."

-마 부장이랑 실제 선생님 모습이랑 오버랩되는 부분도 있나요?

"허허, 그건 제가 얘기한다고 믿으실 것 같진 않고. 아니라고 해도 또 안 믿을 것 같고. 마 부장이 최 전무 라인이잖아요. 어찌보면 조직에 굴종하는 인물인 거죠. 전 어렸을 때부터 저항감이 많았어요. 학교와 학연에 매이는 삶을 절대로 못 견디는 기질이었으니. 자유로운 걸 좋아해요. '독고다이'처럼 지낸 세월들이죠. 젊었을 때 후배들이 제 눈에서 막 레이저가 나온다고 했어요."

-'미생' 덕분에 한동안 '마블리'(마 부장+러블리)로 불리셨죠. 근데 요즘 그 별칭을 후배 마동석 씨가 가로챈 것 같은데.

"괜찮아요, 요즘엔 '손블리(손종학+러블리)'라 불러주시잖아요."(웃음)

'미생'의 마부장과 달리
권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
15살 때 학업 손놓고 배우의 꿈
안정적 직장 원하던 부모 반대
아버지 유언도 "연기 그만해라"
이듬해 연극대상 받아 제사상에
'모래시계'로 뮤지컬 첫 도전


매일경제

배우 손종학이 뮤지컬 `모래시계`를 공연하는 극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양유창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손종학은 1967년 서울 태생이다. 학창 시절 그는 틀 안에 갇힌 삶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이였다. 날 때부터 자유로운 배우 기질을 타고난 걸까. 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삶이란 도무지 몸에 맞지 않았다. 그가 초·중학교 다니던 시절엔 선생들의 '몽둥이질'이 끊이질 않았다. '권위'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매질'이 쏟아졌다. "폭력에 굴하지 않고 곤조 있는 학생"이던 그가 학교라는 공간에 거부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결과. 결국 서울 중대부중 2학년 시절 그는 학업을 작파(作破)한다.

-학교 그만둔 거예요?

"아, 그건 아니고. 공부를 아예 안 한거죠, 허허. 영 재미가 없으니까. 근데 이거 뭔가 나 자신이 다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하고 대학은 동양공전(동양미래대학교) 건축학과에 갔어요. 당시 건설 경기가 좋았던 시절이라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어 들어간 겁니다. 현실적인 이유였어요. 부모님께서 좋아하시기도 했고. 그런데 역시나 금세 시들해지더라고."

-그러다 연극과 인연이 닿은 거군요.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요?

"보자…. 결정적인 계기라면… 제가 대학교 1학년일 때네요. 그러니까 스무 살 때. '사막의 꽃이 되리라'라는 2인극을 홀로 보러 간 적이 있어요. 전 혼자서 많이 보러 다녔는데, 특히 이 '사막의 꽃이 되리라'는 수없이 봤죠. 뭐랄까, 보면 볼수록 '뜨거워진다'랄까요. 하, 점점 더 교실에 앉아 있는 그 답답함을 도무지 못 견디겠더군요.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하면 기질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니까."

-그러다 이듬해 민예극단에 들어갔군요.

"그렇죠.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1987년 봄이었네요. 그해 한 신문 지면에 민예극단 워크숍 단원 뽑는다는 작은 기사를 봤어요. 30~40명 정도 뽑는다더군요. 이걸 보고 '맨 땅에 헤딩'해보자 한 거죠. 연극 해본 적 없고 전공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마치 무엇에 씐 것처럼요. 마당극을 주로 하는 극단이었는데 '서울말뚝'이라는 공연을 올린다대요. 여기서 마당극, 창극은 기본적으로 배웠어요. 판소리, 한국무용 같은 연기 외적인 부분도 같이요."

매일경제

사진=양유창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학교 생활보다 즐거우셨나봐요?

"그럼요. 뭔가 새로 만들어 가고 몰랐던 걸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했어요. 연기할 때 캐릭터들마다 입장을 고려해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이들 각각의 삶을 생각해보고 그러는 게 참 흥미롭더군요. 작품 외적으로도 즐거웠고요. 동료들이랑 땀 흘리고 울고 웃고 그랬던 시간들, 지금 생각해봐도 참 행복했습니다. 일 끝나고 사석에 돌아왔을 땐 술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그런 '사람 냄새'에 중독돼버린 거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손종학에게는 스물한 살이 꼭 그런 시기였다. '학업'이라는 답답한 '알'을 깨고 나와 '연극'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 시기. 하지만 기존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고 삶이 더 순탄해지리란 법은 없었다. 부모님과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장손인 아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바랐던 부모님은 저 하고 싶은 일에 불쑥 뛰어든 아들을 반길 리 만무했다. 특히나 아버지와의 갈등이 불가피했다.

-반대 많이 하셨다면서요.

"반대하시다마다요. 걱정되니까요. 제가 이래 봬도 장손입니다. 건축학과 잘 다니다 갑자기 연극한다고 하니 심경이 어떠셨겠어요. 그리 자식한테 관여하고 터치하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옆에서 지켜보시기만 하셨는데, 아버지께선 직접적으로 무어라 하실 적이 많았습니다."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허, 이걸 말해도 될지…. 저희 아버지가 2002년에 돌아가셨어요. 6개월간 병실 생활을 하시다 그렇게 가버리신거죠.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버지가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 연기 이제 그만해라'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다른 일 좀 찾아보라는 거였죠."

-일종의 유언이셨던 거네요.

"오죽하면 그러셨겠습니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들이 아니었으니…. 아버지 걱정은 늘 그런 것이었습니다. '배우는 근사하게 잘생긴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아버지 시선에 저는 근사하게 잘생겨 보이지 않았던 거죠."(웃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세요?

"어… 아버지가 그리 반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응원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형제분들이 많으신데요. 모이면 '종학이 쟤는 왜 기 센 역할만 맡냐'는 얘기가 항상 나와요. 왜 자꾸 안 좋은 배역만 맡냐는 거죠. 어느 연극에서 '망치'라는 악역을 연기할 때였는데 작은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시니 아버지가 제 편을 들어주시는 겁니다. 이걸 언제인가 우연히 문 밖에서 들은 거예요. '야, 배우가 지한테 역할 들어오면 그걸 하면 되는 거지 뭘 그런 걸 가리고 하냐. 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다.' 그 말씀을 몰래 듣는데 마음 한구석이 짠했어요. 굉장히 죄송스러웠고요."

-이후 연극인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야말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이었죠. 안정된 생활이 아니니까. 고정적인 월급이 보장돼 있는 분들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계획 자체를 세울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다보니 잡념을 오히려 덜어내게 되더군요. 앞날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도리어 해가 되니까. 내일 생각, 잡 생각 없이 24시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충실하자는 식으로 여태 살아온 겁니다. 남들 보기엔 한심하게 여겨질 수 있겠죠. 그렇게 사는 만큼 주변 사람들, 특히나 가족과 동생들이 힘들 테니까."

-무명생활이 일종의 견딤의 시간이었겠습니다.

"그래도 그리 힘들었다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저는 집에서 극단을 오갔으니까. 집에서 얻어먹고 다녀 배고픔은 몰랐으니까. 지방에서 혈혈단신 올라와 자취하며 살던 동료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이들 얘기를 들으면 그저 놀랍고 경이로워요. 부모님이 채소가게 등 구멍가게를 많이 하셨어요. 어릴 땐 제가 새벽에 가락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오면 부모님이 가게에 진열하셨어요. 물건 떼어주고 바로 연극하러 가는 식이었던 거죠. 다만, 돈을 벌지 못하니 사람 구실 못하고 산 건 있어요. 경조사, 부조 이런 거 있으면 낼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죠. 연극일 계속 몰입하면서 주변을 두루두루 챙기고 관심 가져주지 못한 건 지금도 부끄러워요."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오게 마련이다. 손종학에게는 2003년이 그런 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쯤 지났을 무렵 대학로에 올린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가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 선배 연극인 김담희(56)와 호흡을 맞춘 '늙은 부부 이야기'는 당시 흔치 않은 황혼 로맨스물로 각광받았다. 홀로 사는 60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 사별하기까지를 다룬 이 연극에서 손종학은 주인공 박동만을 열연했다. 그리고 그해 '연극인 대상'까지 단숨에 거머쥔다. 난생 처음 "연극만 해서 밥 먹고 살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긴 기점이었다.

-드라마틱하네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상 받은 걸 보셨으면 참 좋아하셨겠어요.

"당시 받은 상패를 아버지 제사상에 그대로 올려드렸어요. 그순간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이걸 직접 보셨으면 뭐라 하셨을지…. '늙은 부부 이야기'는 이후 이순재 선생님 등 여러 대선배들이 주인공으로 연기하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 작품에 처음 출연한 건 바로 접니다. 오리지날인 거죠(웃음). 60대 남녀가 같이 살다 여자가 먼저 죽으면서 동만 혼자 남겨지는 이야기예요. 웃음과 눈물이 오가는 좋은 작품이죠."

-서른일곱에 60대 노인을 연하는 게 쉽진 않았겠군요.

"맞아요, 그게 부담스러워 몇 번을 고사했던 작품이에요. 내가 아무리 나이 들어보여도 소극장에서 분장만으로 커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다 싶었던 거죠(웃음). 그 연배에 가까운 선배들도 계시고. 그러다 결국 적임자로 제가 낙점됐어요. 고생 많았죠. 완성된 작품이었던 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구성만 갖고 대본을 얼기설기 짜맞춘 거였거든요. 그걸로 하자니 흐름이 잘 안 생기잖습니까. 창작극이 원래 즉흥적이긴 한데, 그 정도가 심하거니와…."

-그렇게 연극인 생활을 이어오시다 점점 드라마, 영화, 공연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오셨네요.

"이후로도 연극은 계속했죠. 지금까지… 어림잡아 70여 편 올렸어요. 두 아들 커가고 자연히 돈이 더 들대요. 연극 외에도 섭외만 들어오면 뭐든 해야 되겠고…. 영화와 드라마는 다른 세계였어요.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은 거지. 카메라 화면에서 벗어나면 안 되니까."

-자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선생님은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허허, 방임형이에요. 바깥에 풀어놓는거죠. 지들 인생이잖아요.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건데. 이번에 큰아이가 수능을 봤어요. 파일럿 하고 싶다고 항공대 가겠다네요. 알아서 잘 하겠죠."(웃음)

-이제 영화로 가서요, 복기해보면 박찬욱 감독 '박쥐'(2009) 때부터 조연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근데 최근 1~2년 새 출연작들은 전부 기 센 캐릭터네요. '사'자 들어가는 직업도 많고(웃음). '내부자들'(2015) 대외협력실장, '검사외전'(2016) 김 판사. '비밀은 없다'(2016) 시의원, '판도라'(2016) 대한수력원자력 사장…. 올해는 '브이아이피' 부장검사부터 '대장 김창수' 이회응, 최근에는 '반드시 잡는다'에서 최 형사까지.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어요?

"에이 뭐, 생겨먹은 게 그런 건데요, 허허. 아무래도 '박쥐' 때는 영화를 처음 해보는 거다보니 너무 '생짜'였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걱정은 없어요. 제가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기존의 인식을 깰 만한 배역이 나오면 언제든 도전할 테니까. '마 부장'처럼 재미있는 캐릭터를 또 만나겠죠."

-최근에는 생전 처음 뮤지컬 배우에 도전하셨죠. 노래도 직접 하신다고. 제목이 '모래시계'이던가요?

"네, '모래시계'. 지난해 촛불집회 때 기획한 거예요. 뮤지컬 배우 동생들이 시민들과 야외에서 공연하고 그랬거든요. 그때 음악 감독했던 동생들과 집회에 자주 나갔는데요. 같이 술 한잔하다 뒤풀이 때 얘기가 나왔어요. 드라마 '모래시계'(1995)를 뮤지컬로 옮겨보자고. 현재 연습 중이에요(5일부터 공연이 시작됐다 - 편집자 주). 보러 오실거죠?"

인터뷰가 끝난 건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손종학은 근처에 자주 가는 곰탕집이 있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 건너편 곰탕집 빈 좌석에 나란히 앉아 돼지국밥 한 그릇씩을 시켰다. 마주보며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떠넘기던 와중에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배우로서 인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그는 웃으며 답했다. "늘 후회하죠. 그러다 또 털고 일어나는 거지." 땀 흘린 만큼 보람이 있어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열심히 살았다, 재밌게 살았다, 잘 버텨왔다"면서. 그러더니 덧붙이는 것이다. "얼마 전 후배 진선규가 청룡영화상 조연상 받았죠. 이런 말을 하대요. '먼 우주에 있는 멋진 배우를 향해 나아간다.' 한 발 한 발 디뎌가면서 저 역시 더 멋진 배우가 돼야죠."

이날 손종학은 본인 인생작으로 세 편을 꼽았다. 경제난을 해결해준 '늙은 부부 이야기'와 '필로우맨'이라는 연극, 그리고 자기 얼굴을 세상에 각인시킨 드라마 '미생'. 그가 선보일 또 다른 '신스틸러'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은 왜인지. 헤어지기 전 그가 말했다. "다음엔 소주 한잔 하면서 얘기하자고요!"(웃음)

[김시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