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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열면 혼란, 닫으면 적폐…‘판도라상자’ 앞 법관 블랙리스트 조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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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확보 했는데…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추가조사위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 등 4명 PC조사 ‘부동의’

판사들 사이에서도 강제조사 적법성 두고 ‘갑론을박’

“블랙리스트 의혹 해결 못하면 개혁동력 상실할 수도”

이데일리

[이데일리 조용석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 뒷조사 문건을 만들었다는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는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핵심 증거로 꼽히는 컴퓨터를 확보했지만 당사자들의 거부로 인해 열어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 내에서는 “흐지부지 끝나 의혹만 증폭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PC 손에 쥐긴 했는데…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추가조사위

12일 대법원 등에 따르면 추가조사위는 최근 법관 블랙리스트가 저장돼 있다고 의심받는 컴퓨터 4대를 확보하고 보존 조치했다. 사건 컴퓨터는 임종헌(사법연수원 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 이규진(18기)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김모(32기) 전 법원행정처 기획1심의관(현 서울중앙지법), 임모(34기) 현 기획1심의관이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추가조사위는 사건 컴퓨터를 모두 확보하고도 열어보지 못하고 있다. 임 전 차장을 포함한 당사자 4명이 시종일관 PC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추가조사위는 사실상 공전상태다.

PC 조사는 추가조사위의 핵심이다. 앞서 대법원은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를 꾸리고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결론 내렸으나 오히려 사법부 내 불신만 커졌다. 사건 컴퓨터를 조사하지 못하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통해서만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국법관대표회의(법관회의)는 PC 직접조사가 포함된 추가조사를 요구했고, 김명수 대법원장도 이를 받아들였다. 추가조사위가 PC를 직접 들여다보지 못할 경우 앞서 진상조사위 활동과 다를 바가 없다. PC 조사에 추가조사의 성패가 달린 셈이다.

추가조사위가 PC조사를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당사자들이 반대를 무릅쓰고 강제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강제조사를 위해서는 검찰이 청구하고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이 필요하지만 이번 사건은 법원 내부의 일로 이 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 없다. 업무용 컴퓨터를 회사가 강제 조사한 사례를 다룬 법원 판례도 매우 부족하다.

또 사법부 내부에도 PC 강제조사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있는데다 정치권으로 논쟁이 옮겨 붙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추가조사위의 염려다. 자유한국당 주광덕 의원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의 불법적인 행태가 멈춰지도록 해야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고발 등 법적 책임, 국정조사와 청문회 등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수도권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영장주의(강제처분을 하기 위해서는 영장이 필요하다)를 잘 알고 있는 판사들이 하는 조사인데 추가조사위도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조사를 하기에는 부담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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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조사 지시한 대법원장…강제조사 강행 가능성

법원 내부에서는 사건 PC들이 업무용 컴퓨터였다는 점을 들어 업무 목적 강제조사를 해도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또 일본·독일·미국 등에서 회사 측이 업무감시를 위해 직원의 메신저 또는 이메일을 강제로 열어본 것을 무죄 판단한 판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소속 차모 판사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법원행정처에 근무한 심의관이 사용한 법원 소유 컴퓨터를 보는데 동의가 항상 필요하다는 논리라면 국가기관 내부 조사과정에서 공무원의 동의를 받지 않는 조사는 모두 위법해 증거능력을 부정당할 것”이라고 썼다.

또 사건 PC는 모두 업무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사법행정의 총책임자인 대법원장이 이를 소유·소지·보관의 권한이 있고 따라서 조사권한을 위임받은 추가조사위가 강제 조사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법원 내부에서는 추가조사위 구성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위원장인 민 부장판사와 3명의 추가조사위원은 법관회의 소속이다. 위원장 포함 추가조사위원 7명 중 4명이 추가조사를 주장했던 법관회의 소속이다. 반면 법원행정처와 관련 위원은 없다. 추가조사위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자들이 PC조사를 승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블랙리스트 의혹은 대법원장이 사법개혁에 앞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꼽힌다. 김 대법원장이 추가조사를 지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를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하면 사법개혁의 동력 자체를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블랙리스트 의혹을 해결하지 못하면 대법원장이 추진할 사법개혁은 동력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며 “당사자들이 떳떳하다면 컴퓨터 조사에 동의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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