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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머리카락 10만 개로 그린 '광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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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째 탄광촌 삶 그려온 황재형

7년 만에 유화 대신 머리카락으로 '십만 개의 머리카락' 展 열어

"머리카락은 사랑의 징표"

"10년 전, 이사 간 광부 집에서 이 깨진 거울을 발견했죠. 조각난 거울을 버리지 않고 광부는 자기 아내가 20대 때 찍은 사진을 끼워넣었더군요. 진달래꽃 앞에서 맑게 웃는 여인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어요. 내가 탄광촌에 들어와 끝없이 찾아 헤맸던 인간의 순수한 심성, 황순원 선생이 '우리가 예술로 드러내야 할 것은 누이의 누런 이'라고 했던 그 마음이 깨진 거울 속 사진에 오롯이 담겨 있었지요."

7년 만의 신작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을 위해 태백에서 서울로 새벽같이 올라온 황재형(65)은 길이 30㎝쯤 돼 보이는 낡은 거울을 보여주며 말했다. "하필 왜 머리카락이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다. 일명 '광부 화가'로 35년째 태백 탄광촌 사람들 이야기를 질박한 유화로 그려온 황재형이 모처럼 들고나온 캔버스가 온통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었다. "35년 전 인간의 참모습을 만나러 광산에 들어왔지만 나 역시 내 눈으로,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만 그들 모습을 그린 게 아닌지, 타인의 불행으로 내 행복을 구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거울 속 사진이 일깨워주더군요. 화가의 개성은 최대한 누르고 그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카락으로 그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조선일보

11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황재형이 어느 광부의 초상을 그린 ‘드러난 얼굴’ 앞에 섰다. 풍채만큼 목소리 우렁찬 그가 “내가 대머리라 머리카락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폭소가 터졌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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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머리카락'이라고 적힌 신작 27점은 첫눈에도 작가의 '고행'이 느껴진다. 태백의 미용실을 순례하며 얻은 머리카락들을 한 올 한 올 접착제로 붙여 나간 지난한 작업이다. 한 작품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 평균 석 달. 손이 망가지고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갔다. "물감 대신 머리카락을 선택한 멍에죠.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아요, 하하!"

광부이자 화가인 황재형에게 머리카락은 사랑이다. 머리카락 한 뭉텅이와 짚신으로 표현한 '원이 엄마 편지'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이응태(1556~1586) 무덤에서 영감을 얻었다. 미라와 함께 나온 유품 중 아내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지은 미투리 한 켤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동서양 모두에서 머리카락은 사랑의 징표였어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할 때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냈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신구가 유행하기도 했지요."

조선일보

캔버스에 머리카락으로 그린 ‘아직도 가야 할 땅이 남아 있는지’(2016년 작). /가나아트센터


검은 머리카락으로 검은 탄광을 '그린' 첫 작품 '별바라기'는 갱도 앞에서 쉬고 있는 광부들 모습이다. '내 땅을 딛고 서서'는 신입 광부가 들어온 날 한바탕 어우러져 밥을 나누는 정겨운 장면. '아직도 가야 할 땅이 남아 있는지'도 뭉클하다. 물난리로 탄광촌이 뒤덮인 날 어디에 발 디뎌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주민들. "농촌에서 도시로, 다시 탄광촌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홍수로 집을 잃으면 또다시 갈 곳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린 작품입니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황재형은 민중 미술 1세대로 불리는 리얼리즘의 대표 주자다. 갱도 매몰 사고로 죽은 광부의 작업복을 그린 '황지 330'으로 데뷔한 뒤 탄광촌에 살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흙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가 2013년 발표한 인물화 '아버지의 자리'는 삶의 뒷전으로 밀려난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젖은 눈망울을 묘사해 커다란 감동을 안겼다.

군부독재, 숨 막히는 도시 생활이 싫어 대학 졸업하자마자 태백으로 들어간 황재형은 결벽이 심한 작가였다. "죽은 광부의 아내들은 보통 선탄부 일을 해요. 탄에서 돌을 골라내지요. 일을 마친 뒤 그들이 즐겁게 웃으며 목욕하는 장면이 애틋해 화폭에 꼭 담고 싶었는데, 오랜 망설임 끝에 포기했어요. 그 욕망은 결국 도시인인 나의 퇴폐성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죠. 그날의 죄의식을 삭이고 지우기 위해 이 고달픈 머리카락 작업을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14일부터 내년 1월 28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02)720-1020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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