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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 (화)

[노트북을 열며] 신뢰자본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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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염태정 내셔널 부데스크


한 달 사이에 연이어 발생한 11·15 포항 지진과 인천 영흥도 낚싯배 침몰 사고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예전보다 정부의 대처가 빨랐다고는 하지만, 곳곳에서 불신과 부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믿고 살기 힘든 사회구나 하는 걸 느끼게 했다.

포항은 군대 생활을 했던 곳이라 지난해 경주 지진보다 관심이 더 갔다. 포항 지진(규모 5.4)은 경주(5.8)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이재민(1797명)은 16배, 재산피해(551억원)는 5배 많았다. 경주보다 진원이 얕고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서 발생한 영향이 크지만, 건물의 부실함도 한몫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소속 전문가들이 지진으로 피해를 본 포항 D아파트를 점검해 봤더니 일부 건물엔 있어야 할 철근이 없었다. 1층을 주차장으로 쓰기 위해 비운 필로티 건물의 기둥이 엿가락처럼 휜 것도 부실시공 탓이 크다. 그런 건물을 많은 사람이 보금자리라고 믿고 살았다.

낚싯배 사고 대응 과정도 되짚어보면 해경을 믿을 수 있겠나 싶다. 신속히 출동해야 하는데 고속단정이 없어 육지로 이동해 항구로 간 뒤 민간 어선을 타고 현장에 가는 모습도 연출됐다. 출동시간을 둘러싼 말 바꾸기, 일부 구조대원의 미숙한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서로 믿을 수 없어 안전장치를 만드느라 비용·시간이 들어가는 건 사업계약서 작성 때만이 아니다. 부산시는 최근 필로티 구조의 건물을 지을 때 내진설계 확인 절차를 대폭 강화한다고 밝혔다. 지진 때 필로티 건물 기둥이 엿가락처럼 휜 것을 봐서다. 철근 공사 때 반드시 감리자의 입회 아래 동영상을 촬영해 제출하도록 했다. 이게 다 돈이다. 지방자치단체로선 관리·감독에 예전보다 더 많은 인력과 돈을 써야 하고 건물주도 마찬가지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낚시 전용배 도입을 검토하고 승선 정원 감축 등 낚시어선 안전 관련 규정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했다. 좋게 말해 안전 강화지 낚싯배 주인을 믿지 못하니 규제하겠다는 건데 비용과 시간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0년대 중반 신뢰(trust)를 번영의 요건으로 꼽았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상대방이 규범에 기초해 정직하고 협동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은 나라는 잘살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잘살기 힘들다는 거다. 신뢰가 높은 나라로 미국·일본, 낮은 나라로 중국· 한국 등이 꼽혔다. 90년대 나온 건데 요즘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대한상의가 지난해 낸 ‘한국의 사회적 자본 축적 실태와 대응과제 연구’를 보면 ‘우리나라의 신뢰·규범·사회 네트워크 등 3대 사회적 자본은 국제사회에서 바닥 수준’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도 중요하지만 신뢰 같은 사회적 자본 확충 없이 선진국은 아직 먼 얘기다.

염태정 내셔널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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