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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치욕은 인조의 사대주의 때문?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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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수 하버드대 선임연구원

실록·승정원일기 차이를 비교

“인조는 애초 明 도울 생각 없어

명·청 사이서 끝없이 타협 시도”
한국일보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박해일이 '인조' 역을 연기하고 있다. 조일수 연구원은 '사대주의를 하다 병자호란을 자초한 인조'라는 고정관념을 부인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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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ㆍ중 G2 시대 한국의 생존법을 두고 불려 나오는 게 명ㆍ청 교체기 조선의 생존법이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노선을 택한 실용적 군주로, 인조는 국제정세 변화에 무감각한 채 대명의리론에 기댄 사대적 군주로 그려진다. 이 이분법은 ‘광해군의 길’ 대신 ‘인조의 길’을 택하는 바람에 조선이 망했다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정말 그랬을까.

조일수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계간지 역사비평 겨울호에 실은 논문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이 같은 통념을 부인한다.

논점은 인조가 ‘지는 해’ 명만 쫓다가 ‘뜨는 해’ 청에게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이냐는 대목이다. 조 연구원은 인조도 알 것은 다 알았다고 본다. 그 때문에 중립외교를 고심했으나 결국 병자호란을 당했다고 본다.

조 연구원은 이를 위해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간 기록의 차이를 파고든다. 가령, 대명의리론에 대한 인조의 집착을 강조하는 이들은 후금이 마침내 만리장성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630년 1월 인조가 “우리나라에 약간의 병력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오랑캐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뒤엎어버릴 적기”라 말했다는 인조실록의 기록을 든다. 그러나 이 대목이 더 자세히 실린 승정원일기를 보면 ‘파병의 당위성’ 보다는 오히려 ‘파병의 불가함’을 강조한 내용이라는 게 조 연구원의 주장이다.

방대한 분량을 모두 담을 수 없는 실록은 그 성격상 축약, 편집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는데 이 때 미묘한 조정작업이 발생했다는 지적이다. 승정원일기 기록을 차분히 읽어나가면 분개, 격분, 한탄이 있지만, 전체적 맥락은 명을 도울 생각이 없다는 쪽이다. 인조실록은 그 가운데 묘하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만 골라 실었다는 얘기다.

조 연구원이 보기에 인조 또한 중립외교를 고심했지만 결국 병자호란을 당하자 “강포한 청나라에 맞서 저항했다는 신화를 내세우려 했던 후대인들에 의해 인조 대의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됐을 가능성이 있다. ‘대명의리론에 집착한 인조’라는 관념은 “인조실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개입된 자의성을 짐작하지 못해 일어난 오독”이라는 것이다. 인조는 1636년 2월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라는 요청에 대해 ‘대청국황제’라 부르진 못하겠으나 ‘청국한(淸國汗)’이라 부르겠다는 제안을 내놓는 등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했다.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지금에야 청의 승리가 명백하지만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명은 몽골과의 대결에서 50만 대군이 몰살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도 살아남은 국가다. 청과 대결하던 때도 망하는 그 순간까지 실제 국력은 명이 더 우세했다. 청은 자주 패배했고, 조선에다가 ‘명과 화해할 수 있게 다리를 놔달라’는 요청을 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명이 청을 물리친 뒤 조선을 배신자로 규정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조로서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게다.

병자호란이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실패다. 하지만 인조도 줄타기 하느라 진땀 흘려야 했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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